인텔리겐치아의 기원 과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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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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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1. 인텔리겐치아의 기원과 정의
인텔리겐치아라는 말 자체는 분별력, 이해, 지능 등을 의미하는 라틴어의 intelligentia를 러시아어로 발음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 용어가 러시아에 처음 도입된 것은 19세기 중엽, 1860년대에 들어서부터였으나, 이러한 인텔리겐치아의 집단을 논할 때 역사학자들은 그 기원을 1830~40년대의 지식인에서 그 뿌리를 찾고 있다.
일반적으로 서구에서의 인텔리겐치아라는 개념은, 항상 특수한 사회적 힘을 행사하면서 직업적으로 지적 활동에 종사하는 인간들의 집단을 의미한다. 그러나 러시아에서의 인텔리겐치아는 하나의 사상적 집단이지, 다양한 계급으로부터 형성된 직업적, 혹은 경제적 집단은 결코 아니다. 따라서 그 범주에 있어서 일정계급으로 한정지을 수 없고, 실제로 처음에는 귀족 계층에서부터 출발했으며, 이후 성직자와 집사의 자제, 하급관리와 소시민, 농노 해방령이 공포된 후에는 일부 농민계층으로 확대되었다. 이것은 바로 사회적 성격이 강한 이념과 사상으로 특수하게 결합된 러시아 인텔리겐치아의 다양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2. 초기의 인텔리겐치아
(1) 지식인의 탄생
러시아 지식인의 탄생은 전제정부의 강압적인 서구화 정책의 부산물이었다. 러시아를 근대화하기 위한 급진적인 서구화를 추진한 표트르의 치세에는 황제의 지시에 맹목적으로 순종하거나 새로운 방식을 찬양했기 때문에 그 속에서 새로운 반항을 가진 비판세력은 등장하지 않았다. 그러나 서구화 정책이 해를 거듭하면서 외국에서 교육받은 자들이 점점 늘어감에 따라 러시아 사회의 병폐를 고민하는 귀족계층의 지식인이 생겨나게 되었고, 이들은 국가통치체제의 기반이었던 전제정치와 농노제도에 대해 회의를 가졌다.
18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프랑스 계몽주의자들의 사상이 진보적 지식인들 사이에 전파되어 군주제와 봉건제에 대해 비판적인 글들을 발표했다. 집권초기 프랑스 계몽주의에 대해 관심을 보인 예카테리나 2세의 계몽정책(학술과 예술 부분, 역사학의 발달, 중등보통교육을 위한 중학교 건립등..)과 그들의 권리를 획득하게 한 귀족특권장(이전에는 많은 특권을 누리고 있었지만 국가에 봉사하면서 짜르의 신하에 지나지 않았다. 1762년이후 귀족들은 자신의 재산을 마음대로 처분할수 있엇고 자유인으로서의 제반태도 및 인간적인 품위나 자질을 선택할수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기존의 서구 이데올로기가 정당화시켜놓은 인간의 ‘인격’이나 ‘자유’와 같은 개념들을 수용,표명할수 있었다.) 으로 인해 ‘위로부터의 반란’을 가능케 하여 일부계층(귀족계층)으로 대변되는 비판적 사고를 가진 인텔리겐치아가 이 시기에 처음 등장하게 된 것이다. (예카테리나 2세도 집권초기에는 프랑스 계몽주의자들의 저술을 열심히 읽었다. 한편으로는 계몽군주라는 명성을 얻고 싶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의 사상속에서 절대주의와 농노제의 정당성을 찾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 대혁명의 발발은 그녀의 태도를 크게 바꾸어 놓았다. 그녀는 프랑스 대혁명은 계몽 사상가들이 퍼뜨린 사상의 ‘나쁜 열매’라고 보고, 그들의 저술들의 대부분을 버림과 동시에 억압적인 통치를 더욱 굳혔다. ) 1762년 표트르 3세때 귀족은 납세와 병역으로부터 면제된다는 귀족특권장을 내줌으로써 귀족의 힘은 가장 빠르게 커졌고, 그 뒤를 이은 예카테리나 2세가 새로운 귀족특권장을 발표하여 귀족의 특권을 더욱 확대해줌으로써 ‘귀족의 황금시대’가 펼쳐지게 된다. 그러나 귀족특권장은 강압적인 전제정부의 분위기 속에서 진정한 인간성의 회복을 시사하지는 않았으며, 귀족특권장으로 표면적으로나마 자유인이 될 수 있었던 귀족계층은 대다수 인민들이 노예상태 사이에 빚어지는 모순 때문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예카테리나 2세는 국가농민 당시 러시아의 농민은 크게 보아, 국가와 교회의 사원 등이 소유한 땅을 경작하는 국가농민, 지주 등이 개인적으로 소유한 농민, 기타로 구분되었다.
의 대부분을 사유화시켜 이들을 농노로 전락케 함으로써 농노제를 크게 확대시켜 주었다. 그리하여 예카테리나 2세의 치세 34년동안 약 60개의 농민반란이 일어났으며 그 대표적인 것이 1772~74년까지 계속되는 푸가초프의 반란이다. (김학준. 86쪽) 푸가초프의 반란은 러시아의 농민들이 농노제에 맞서 일으킨 러시아 역사상 가장 큰 반란으로 비록 실패했지만, 봉건주의의 바탕을 뒤흔들어 놓았으며 혁명적 반봉건주의 사상이 빠르게 자라나게 만든 매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18세기에 러시아 사회는 귀족, 도시민들, 농민들 이라는 3개의 기본적 계층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2)개인적 차원의 움직임(노비꼬프와 라지쉬체프)
예카테리나 2세의 억압통치는 파벨 1세의 뒤를 이은 알렉산드르 1세에 의해 계승되었다. 나폴레옹의 유럽정복전쟁에 의해 알렉산드르 1세는 여러차례 유럽전쟁에 개입해야 했고, 러시아를 침략한 나폴레옹과도 몇차례 전쟁을 하였는데 1813년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나폴레옹에게 결정적 승리를 거두게 되어 1814년 동맹국들과 더불어 당당하게 파리에 입성했다.
이러한 전쟁과 이것에 따른 외교는 러시아의 재정을 크게 압박하고, 국내에 상당한 불안을 조성했다. 그러나 나폴레옹 전쟁이 러시아에 미친 가장 큰 영향은 이 전쟁에 참가했던 귀족 및 상류층의 자제들 사이에 자유주의적 사상이 팽배해졌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1776년의 미국 독립전쟁과 1789년의 프랑스 대혁명을 가져온 자유주의적 및 입헌주의적 사상과 제도를 목격하였고, 아직도 절대 전제 군주 아래 시달리는 러시아의 비참한 상태와 비교하게 된 것이다. 이들은 다양한 비밀 결사들을 조직하고, 입헌 군주제 또는 완전한 공화제로의 정치 체제의 개편과 농노의 해방, 그리고 농민에 대한 토지 소유, 또는 경작권의 인정 등 사회구조의 개편을 광범위하게 논의했다. 물론 이들 이전에도 농노의문제로 깊은 고뇌에 빠지고 이들의 해방을 주장하다가 처벌된 용감한 사람들이 있었다. 예카테리나 2세 시대의 노비코프와 라지쉬체프가 그 대표적인 사람들이다. 초기의 인텔리겐치아로서 인간의 존엄성 회복이라는 모토를 가지고 러시아 지성사를 연 사람으로 노비꼬프와 라지쉬체프 두 사람을 들 수 있다.
노비꼬프는 풍자잡지를 발간하면서 전제 정치와 농노제의 문제점을 고발하고 계몽주의의 전파에 앞장섰으며 ‘자유공석회’ 개인적 자유를 지지하여 정치적 자유주의를 추구하려는 사회운동, 종교신앙의 근대화와 폭넓은 신아의 내면화를 추구한 정신운동이라는 두가지 성격이 있었다.
참고문헌
※ 참고문헌
1. 단행본
- 박태성, 『역사속의 러시아 문화』, PUFS, 1998
- 김학준, 『러시아사』, 대한교과서주식회사, 2000
- 임영상, 『러시아인뗄리겐찌야 론』, 탐구당, 1990
- 박윤형,「러시아의 지성문화」, 『러시아 지역연구 제3호』,한국외대 러시아 연구소, 1997 - 니꼴라이 / 랴자노프스키, 『러시아역사 Ⅱ』, 까치, 1982
2. 논문
- 김정자 , 「19세기 러시아 사회상에 나타난 니힐리즘」, 고려대 교육대학원, 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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