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과 악의 본질에 천착한 작가 도스토예프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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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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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선과 악의 본질에 천착한 작가 도스토예프스키
나는 어린아이처럼 그리스도를 믿고 그 신앙을 고백하는 것이
아니다. 나의 호산나는 회의라는 시련의 도가니를 지나왔다.
--도스토예프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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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예프스키는 인간의 자아에 대한 끊임없는 고찰로 선과 악의 본질을 꿰 뚫고자 했던 19세기 러시아 민중작가이다. 도스토예프스키가 민중작가인 것은 대 부분의 그의 소설에서 배경이 되고 있는 곳이 소외되고 가난한 이들의 터전인 도시의 뒷골목이기 때문이다. 그의 소설은 이 곳에 사는 소외된 이들과, 그들의 자기파괴적인 범죄로 이어지며, 이러한 상황은 도스토예프스키가 선과 악의 문제 를 개진하는데 적절한 심리적 상황을 연출해 내곤 한다. 소외되고 가난한 이들의 필연적 허무주의는 곧 신의 문제에 대한 의문까지 유발시키기 때문이다.
도스토예프스키에게 있어서 신의 문제는 곧 선과 악의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까라마조프가의 형제』에서 이반 까라마조프가 신이 창조한 세계를 부정하며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왜 아무죄도 없는 어린아이들까지 고통받아야 하지? 라 고 의아해 하는 것처럼 그의 지하 생활자들은 신을 간과한채 악의 눈으로 신의 세계를 평가하려 하곤 한다. 이러한 논리는 오류이다. 선과 악의 대결, 신과 악마 의 대립구도라는 것은 본래가 신의 품안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논리이기 때 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반그리스도적인 악의 주변에는 항상 선이 존재하고 있다. 아니 선의 주위에 악이 존재한다라는 표현이 훨씬 정확할 것이다. 왜냐하면 악이라는 것은 언제나 선을 더욱 현실적으로 생동감있게 드러내는 구도로 사용되기 때문 이다. 그러나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에서 그의 악한 인물들이 (물론, 여기서 말 하는 악한 인물이라는 것은 악마와는 틀린 의미이다) 선한 인물들의 부속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까라마조프가의 형제』에서 이반의 논리가 알료샤의 신 앙에 결코 뒤지지 않는 것처럼, 그들은 완전한 하나의 개체로 인정받고 있으며 때로는 소설안에서 보여지는 사상의 클라이막스가 이들의 내부에서 일어나곤 한 다. 『죄와 벌』의 라스콜리니코프, 『악령』의 스따브로긴, 『까라마조프가의 형 제』의 이반이 작가의 치열한 고뇌의 산물임을 간과할 수 없음은 물론이다. 결과 적으로 우리는 이런 소설의 구도에서 도스토예프스키가 전하고자 하는 선에 대 한 믿음을 확신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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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작가의 선과 악에 대한 사상이 극대화되고 있는 것은 그의 최후 의 대작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를 통해서이다. 레이조프의 논문 「까라마조프 가의 형제의 구상의 연혁」이 설명하는 바에 의하면, 이 소설의 최초의 구상과 형사사건을 줄기로 하는 소재는, 소설이 발행되기 30년전인, 도스토예프스키가 옴스크의 유형지에 있던 무렵 완성되었다. 이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수십년에 걸친 인생경험과 심리적, 철학적, 정치적, 윤리적 노고가 이 소설의 창작을 위하여 필 요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는 『지하생활자의 수기 』를 필두로 하여 이어진 그의 지하생활자들의 고뇌가 선과 악의 변증법을 거쳐 신의 영역에까지 접근을 시도하는 작가적 고뇌의 결과물인 것이다.
이처럼 수십년에 걸친 그의 독특한 인생경험은, 이반의 목소리가 때로는 더 우렁차고 설득력있게 보여질 수도 있지만, (물론 그 반대일 수도) 궁극적으로 그 들의 목소리는 신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름에 있어서 하나하나의 음표역할을 수 행하도록 통합시키고 있다.
사실 온 인류가 지향하고 있는 지상의 목적이란 것은 모두가 이 목적 획득의 끊임없 는 프로세스, 즉 생활 그 자체 속에 포함되어 있으며, 목적 자체 속에는 존재하지 않는 다.(『지하 생활자의 수기』, p. 50)
이렇게 도스토예프스키 자신이 말하는 것처럼 우리가 지향하고 동시에 작가 자신이 지향하고 있는 것은 사고의 과정 그 자체일런지도 모른다. 항상 무엇인가 를 지향하는 듯한 과정들은 궁극적인 어떤 것을 향해 나아가고 있으며, 도스토예 프스키의 관점에서 본다면 그것은 신의 세계에 이르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신의 세계는 오감으로 파악하는 구체적인 세계가 아니기 때문에 인간의 고뇌는 한층 높은 가치를 인정받으며, 끊임없는 사고의 짐을 짊어지고 가는 것이다. 2× 2=4라는 자연율처럼 모든 것이 명확하다면 더 이상 삶의 고뇌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며 따라서 인간은 존재의 이유를 상실해 버릴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고뇌는 선택받은 것이라 칭해도 무방하다.
도스토예프스키가 그의 소설을 통해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선과 악, 자유와 고통으로 인해 고뇌하는 인간의 모습이며, 그는 다만 우리가 걸어가야 할 방향을 어렴풋이 제시하고 있을 뿐이다. 그 방향에 대한 가치평가는 물론 불가능하다. 우리는 그것을 명확히 알 수도 없으며 그것은 이미 인간의 인식을 뛰어넘는 문 제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단지 안주가 불가능한 도달해야 될 목표를 향해 독자를 재촉하고 그 자신, 창공의 별이 더 이상 빛나지 않는 시대에 안내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며 하나의 빛나는 별로 인간세계를 비추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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