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츠카키시에의자 유개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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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데츠카키시에의자 유개념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다이쇼 신교육 사상: 생명의 약동
제9장 데츠카 키시에(手塚岸衛)의 ‘자유’ 개념:
치바사범부속 소학교에서의 ‘자유교육’의 실천을 통해
요약
본 장에서는 ‘자유교육’의 지도자였던 데츠카 키시에(1880-1936)이 ‘자유’의 개념을 어떻게 파악했는가를 그의 자유교육론과 치바사범학교 부속 소학교에서의 실천을 관련지어 검토한다. 통설에 반하여 데츠카의 자유개념에는 독일 관념론적 자유개념으로 해소될 수 없는 함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데츠카의 자유교육은 아이들의 자발성을 중시하고 하나하나의 아이들에게 맞는 학습을 보증하는 것을 추구하지만 교사에 의한 교수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교사의 ‘가르침’에 새로운 의의를 부여하고 있다. 데츠카는 교사는 아이들을 ‘이성화’하는 자가 아닌 진정한 자유의 체현자로 보고 교사의 ‘자치와 자학’이 아이들의 ‘자치와 자학’을 환기한다는 것이다. 본장에서는 이런 데츠카의 자유교육이 이미 존재하는 것과 아직 있지 않은 것과의 마주침(出)에 있다는, 새로운 공동성의 창조에 대한 시도를 포함하고 있음을 명확히 하고자 한다.#278
들어가며
본장의 목적은 ‘자유교육’의 지도자였던 데츠카 키시에(1880-1936)이 ‘자유’의 개념을 어떻게 파악했는가를 데츠카의 자유교육론 및 치바사범학교 부속 소학교에서의 실천을 연결지어 명확히 하는 것이다.
치바사범부속 소학교에서의 자유교육의 실천은 1919년(다이쇼8년)에 데츠카의 책임과 동시에 시작되었다. ‘치바의 자유교육’은 전국적으로 높은 관심을 모아 1929년경까지 십 년에 걸쳐 전개된 것으로 데츠카가 동교로부터 전출된 것을 시초로 운동으로서의 세력을 급속히 잃어가게 되었다. 데츠카는 ‘자유교육’을 실천할 때에 철저한 자학주의를 내걸어 ‘자학실’의 설치나 ‘공통반’, ‘분별반’이라는 두 개의 형태를 사용한 교과지도, 학급자치로 대표되는 아동에 의한 자치활동 등 선진적인 실천을 차례로 시도하였다. 선행연구에서도 이런 자유교육실천의 선구성 나아가 동시대 실천가나 오늘날 학교문화에 대한 영향력이 크다고 평가받고 있다. 때문에 데츠카의 실천의 선구성이 높이 평가받는 한편으로 다른 교육론에 관해서는 오로지 시노하라스케시에 많이 의존하여 데츠카의 논리와 실천의 유기적 연관은 간과된 경향이 있다. 이로 인해 실천과의 관계 속에서 성장한 ‘자유교육’을 둘러싼 데츠카의 논리 및 그 기저에 있는 교육사상은 아직 충분히 그려지지 못하고 있다.
여기서 데츠카의 자유교육론과 그 실천에서 특히 써둘 것은 그가 내건 ‘자유’의 개념이 독특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상세한 검토는 본론에서 하겠지만 데츠카에게 ‘자유’는 규범의 자연주의적인 자유의 개념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선행연구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시노하라를 통해 섭취된 독일 관념론적 자유의 개념으로 환원되지 않는다고 생각된다. 데츠카는 어떤 교육사상을 통해 자유교육의 실천에 몸을 던진 걸까? 본 장에서는 그의 ‘자유’ 개념을 명확히 함으로써 이 물음에 다가서고자 한다.#279
2. 데츠카의 ‘자유교육’의 논리와 실천
데츠카가 교육실천에 종사하게 된 것은 16세 때, 1896년에 그가 오미야 심상고등소학교를 졸업한 해이다. 그 후 1898년에는 도치기현 사범학교에 입학하였고, 1902년에 다시 같은 현 심상고등소학교 훈도(訓導: 구제 소학교 정규교사)로 3년을 보냈다. 나아가 1908년에는 동경고등사범학교 국어한문선과에 입학하여 1908년 같은 학교를 졸업한 것을 기점으로 교유(敎諭)로 후쿠이 사범학교에 부임한다. 데츠카의 자유교육의 실천에 이론적인 영향을 끼친 시노하라스케시(篠原助市)와의 만남은 여기서 이루어졌다. 나아가 군마현 제1사범학교 교유와 동 부속소학교 주임을 겸임한 뒤 1917년 교토여자고등사범학교 교유 겸 교토부 지방 시학(視學: 사무와 시찰 업무)으로 교토에 부임하였다. 이제 데츠카의 교토부임 조금 뒤 시노하라도 교토로 주거를 옮기고 데츠카의 주선으로 그들은 같은 교정의 동료로 살며 늘 친밀한 관계가 되었다는 것이다. 시노하라는 『자유교육의 참 뜻』에 붙인 서문에서 당시를 가리켜 ‘교토에 있는 사이 특별히 아침 저녁으로 왕래하고 교육 상 문제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술회한다. 나아가 우연이 겹쳐 1919년 데츠카가 치바사범학교 교유 겸 동 소학교 주임으로 부임하자 동시기에 시노하라도 동경고등사범학교 교육학 교수로 초빙되어 시노하라는 치바사범부속 소학교에서의 자유교육의 실천에 직접 관여하지는 못하게 된 것이다.
데츠카는 치바사범부속의 책임과 동시에 자유교육을 즉각 실천에 옮겼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치바의 자유교육의 융성은 대략 데츠카의 치바사범부속 재임시기와 일치하며 1926년에 데츠카가 치바현립 오타키 중학교 교장으로 부임하여 이동을 부득이하게 하게 됨으로써 운동은 급속히 그 추진력을 잃고 말았다. 그 후 치바사범부속을 떠나도 데츠카의 자유교육에 대한 열의는 사라지지 않고 오타키 중학교 교장에게 책임을 넘긴 후에도 직접 자유교육의 도입을 시도하였으나 그 시도는 데츠카 교장 배척을 원한 동맹휴업이라는 모습으로 거부되었다. 나아가 1927년 6월에 데츠카는 동교를 의뢰사직하고 이듬해 4월에 자유와 병학원을 창설하여 원장이 되었으나 이 또한 경영난으로 1934년에 손을 떼게 된다.#280 그리고 그 2년 뒤인 1936년 병을 앓아 사망에 이른다.
치바사범부속에서 데츠카의 자유교육운동의 전개나 그 실천의 개요에 관해 본장에서는 지면의 한계상 그의 ‘자유’ 개념과의 관련 속에서 특히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만을 다룰 수밖에 없다. 다만 데츠카의 자유교육의 개요에 관해서는 선행연구에서 이미 충분히 정리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특히 데츠카가 치바사범부속 소학교에서 주도한 ‘자유교육’에 관한 일차자료 및 이차자료를 다룬 선행연구로 나가이 아키라(永井輝)에 의한 연구가 거론된다. 나아가 치바사범부속 소학교에서 데츠카의 자유교육운동의 전개를 다룬 연구로는 혼마 미치오(本間道雄, 1982), 산죠분(三上文, 1951) 등이 있다.
나아가 전술한 치바사범부속 소학교의 자유교육운동의 전개와 거기서 데츠카의 위상에 관한 연구를 더해 다이쇼 자유교육의 계보에서 데츠카의 자유교육을 위치지어 밝히고자 한 나카노 히카루(中野光)의 연구가 거론된다. 나가노는 데츠카의 자유교육의 특징으로 전학년을 대상으로 철저한 자학과 자치의 실천 및 아이들에게 교과나 학습의 장소를 자유롭게 선택하도록 하는 ‘자유자습’ 시간을 특설하였다. 이런 시도는 획일주의나 주입식 교수법을 배제하고 아이들의 ‘내적동기’를 존중한다는 데츠카의 교육관을 반영한 것으로 그 혁신성이 높이 평가되었다. 그런데 한 편으로 나카노는 “당시 급진적이면서 전투적이었던 ‘치바의 자유교육’은 그 사회관·국가관에 결코 반체제적인 것은 없었다”(나카노, 1986: 171)는 것으로서 데츠카가 국가권력에 대한 교육내용통제 정책에 대해 근본적인 비판은 하지 않았음을 문제시한다. 이로부터 대체로 데츠카의 이론과 실천에서 내용론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아이들의 발언이나 질문을 어떤 식으로 발전시키고 조직했는가가 불명확한 것이 자유교육의 하나의 한계이라는 견해가 나타난다.(나카노, 1986: 173-1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