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오나라 인물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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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오나라 인물에 대하여

후한 말의 무장. 절강성의 오군 부춘사람으로 지방의 호족 출신이며, 시호는 무열황제(武烈皇帝). 자는 문대(文臺). 춘추 열국 때 명장 손무자의 후손. 17세 때 해적을 퇴치하여 용명을 날렸고, 교위로서 허창이란 자가 회계 땅에서 반란을 일으켰을 때 이를 토멸하여 이름을 떨쳤다. 184년 황건적 난리에 사공(司空) 장온의 부하로써 수하를 이끌어 토벌에 공을 세워 오정후에 봉해 졌다. 동탁 토벌 연합군의 선봉으로 싸우다가 원술이 양초를 대어 주지 않아 패하여 달아나던 중 부하 용장 조무를 잃었다. 동탁이 낙양을 불사르고 천도하자, 폐허가 된 도성에 들어가 뒤치다꺼리를 하다가, 건장전 우물 속에서 전국옥새를 얻고는 급히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을 먹었다. 192년, 형주목 유표에게 돌아갈 길을 끊기어 한바탕 충돌이 있었으며 그것을 혐의 먹어 결국, 다시 유표를 쳐 번성과 등성 두 성을 뺏고 양양성을 에워쌌다가 괴량의 꾀임 수에 빠져 여공을 쫓아 현산에 오르려다가 복병이 내리쏜 석전에 맞아서 죽으니 나이 겨우 37세였다.

동오의 용장. 손견의 장남이요, 손권의 형. 자는 백부(伯符). 유표를 칠 때 종군하여 적장 진생을 쏘아 죽여 첫 공을 세웠다. 아비 손견이 죽은 뒤 원술 휘하에 있으면서 아버지의 군대를 이어받고 강남 여러 번 전공을 세웠으나, 큰 뜻을 누를 길 없어 주치, 여범의 도움으로 원술에게 전국옥새를 담보로 군사를 빌어 군사를 빌어 동오로 들어가 주유, 장소와 함께 강남을 평정, 일족과 측근을 태수로 임명하여 진무와 개발에 힘쓰며 오나라의 기반을 튼튼히 한 인물. 첫 사업으로 유요를 쳤을 때는 태사자와 용전하였고 삽시간에 적의 두 장수를 죽여 소패왕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이 싸움에서 화살을 맞고 죽었다고 거짓 발상 하여 적을 유인해 크게 이겼다. 주유와는 의형제사이이며 대교를 아내로 맞음. 마침 원술이 제위에 오르려 하자 손책은 이를 격렬하게 반대 비난하였다. 조조는 이를 알고 손책과 손을 잡는 편이 이롭다 하여 그를 오후에 봉하고 혼인 관계를 맺었다. 200년, 조조와 원소가 관도에서 대치하고 있을 때 손책은 허도에 있는 한나라 헌제를 맞아들이려 하였으나 실패. 일찍이 조조의 모사 곽가가 말하기를 경솔하여 앞 뒤 분별이 적고, 참을성이 적고, 지모가 부족하여 한 사람의 자객으로서 제거할 수 있으며 다음날 반드시 이름도 없는 자의 손에 죽으리라 하였다고 하더니 뒤에 과연 죄지어 죽은 허공의 식객에게 찔리고 투병 중 우길 선인을 죽이고는 그의 환영에 시달리다 26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오나라의 초대 황제. 손견의 아들로 자는 중모(仲謀). 머리는 네모나고 입이 크며 눈은 파랗고 수염은 붉어, 일찍이 한실 조정의 사신 유완은 그의 비범한 풍모를 찬양하여 제왕의 기상이 있다고까지 하였다. 200년, 형의 패업을 이어받아 주유 등의 보좌를 받아 강남의 경영에 힘썼다. 당시 형주에는 유표가 세력을 떨치고 화북에는 조조가 있어 남하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이에 손권은 촉의 유비와 결탁하여 남하한 조조의 대군을 적벽에서 대파하여 강동의 기반을 굳혀 천하삼분의 기초를 닦음. 뒤에 여러 차례 위의 침공을 받았으나 번번이 공 없이 물러나게 하였다. 조조의 친정을 맞이하여서는 몸소 출전하여, 몇 번씩 죽을 고비를 넘기며 위험을 무릅쓴 적도 있었으나, 점점 원숙한 경지에 이르러 많은 모신과 대장들을 잘 거느리었다. 주유, 노숙, 여몽, 육손 등 부하를 잘 골라 써서 기반을 충실히 함. 권모에도 뛰어나, 조비가 조조의 뒤를 이어 제위에 올랐을 때는, 칭신하여 그의 봉작을 받으면서까지 싸움을 일으키지 않으려 노력하였고, 유비도 촉나라에서 한제를 칭하자 손권도 이에 맞서서 황제위에 올라 연호를 황무(黃武)라 정하고 도읍을 건업(建業)으로 정하였다. 그 후는 대체로 촉한과 결합하여 위나라에 대항하는 한편 국내의 발전에 힘썼다. 관상에 따라 71세로 장수하다가 죽음. 재위 24년. 시호는 태황제(太皇帝).

오나라의 수군 용장. 자는 흥패(?興). 파군 임강사람으로 관직은 절충장군, 양자강을 오르내리며 수적질을 하여 용명을 날리다가, 황조에게 갔으나 강도 출신이라고 써주질 않아 손권에게로 항복했다. 하구 싸움에서 능조를 소아 죽인 일이 있었던 때문에, 그 아들 능통과 늘 재미가 없었으나 뒤에 조조와의 싸움에서 능통이 낙마하였을 때, 적장 악진의 얼굴을 쏘아 맞혀 구해준 때문에 겨우 화해가 이루어졌다. 손권이 가장 아끼고 자랑하는 용장으로, 조조의 남침을 유수구에서 맞이했을 때는 불과 백 명의 기병으로 기습하여 위의 진중을 무인지경같이 휩쓸었던 때문에 강좌호신이라고들 불렀다. 유비가 관우, 장비의 원수를 갚으러 출병하였을 때 병을 무릅쓰고 종군하였다가 남만의 만왕 사마가가 쏜 화살을 맞고 나무 밑에 앉아서 죽었다.

손권 산하의 맹장. 동래 황현사람. 자는 자의(子義). 무예에 능한 이외에도 서사 등에도 능했음. 앞서 북해 태수 공융을 도와 황건 잔당 관해의 무리를 물리치고 유비에게 연락하여 도겸을 돕게 하여주고는, 양주자사 유요의 부름을 받아 총총히 떠났다. 그곳에서 손책의 침공을 받아 그와 단기로 맞서 싸웠는데 손책은 그의 용맹을 아껴 사로잡아, 그로부터 손권의 사람이 되었다. 뛰어난 용맹으로 여러 차례 큰공을 세웠으나, 적벽대전 후 손권을 따라 합비 성을 치다가 장료에게 반격 당하여 난전을 맞고 돌아와 죽으니, 그때 나이 사십일 세였다.

손권의 장수요, 동지. 여강 서성사람으로 자는 공근(公瑾). 도략이 밝고 장수재목이었고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다. 특히 수전에 능했다. 손책과 같은 나이로 어렸을 때부터 그와 둘도 없는 친구였다. 동서간으로도 교공의 두 딸을 나눠 얻으니 모두 절세의 미인이었다. 손책이 강동을 차지했을 때 이미 건위중랑장이었다. 손책이나 오태부인-손권의 생모-의 유언에, 모두 군사에 관해서는 공군에게 물으라던 유능하고 신임 받던 장수다. 208년에 조조가 형주를 공략하고 남하했을 때는, 조조와의 강화를 주장하는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은 가운데 노숙과 함께 단호히 싸울 것을 주장하고 필승의 이유를 들어 손권으로 하여금 싸움에 나서도록 했다. 적벽대전을 앞두고 조조에게서 파견된 장간을 역이용하여 처음에는 채모와 장윤을 죽게 하고, 나중에는 연환계를 성공시키는 등 뛰어난 솜씨를 보였다. 대승을 거둔 후 남군태수가 되었다. 유비를 경계하여 미인계를 쓰기도 하고 제갈량과 대립하다 익주의 유장이 한중의 장노 공격을 고심하고 있는 것을 보고 익주를 쳐서 장노를 평정하고 이어서 마초와 동맹하여 조조를 멸할 계획을 세웠으나 실패하고, 남군에서 조조군에게 맞은 화살의 상처가 터져 시상구의 진중에서 죽으니 그때 나이 삼십 육 세였다. 후임으로 노숙을 천거하였고, 이남 일녀를 두었는데, 위는 순(循), 아래는 윤(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