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 자서전 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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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윤동주 자서전 쓰기
내가 태어났던 그 당시의 이야기를 어른들을 통해서 들었고 나는 그 이야기가 마치 내가 겪은 일인 듯 생생하게 다가왔다. 12월 30일에 윤씨 댁 장손의 출생은 지난 8년간이나 온 집안이 기다려왔던 큰 경사였다. 아기의 아명(兒名)을 ‘해환(海煥)’이라고 지었다. ‘해처럼 빛나라’는 기원의 뜻이다. 이 아기가 곧 나다. ‘구라파 전쟁’은 내가 태어난 다음 해 11월에 가서야 독일의 항복으로 인해 포성이 멎었다. 전쟁이 끝나자 구라파에서는 만주산 곡물의 수입을 끊어버렸다. 주변사정은 여러모로 처절했고 다사다난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나는 태어났다.
명동과 명동소학교 시절은 나에게 가장 중요한 시기였다. 나는 28년 생애에서 꼭 절반인 14년을 명동에서 살았다. 그리고 이곳은 나의 인격 및 시적 감수성의 골격이 형성된 곳이라고 할 수 있다. 1932년에 나와 내 동료들이 용정 은진중학교에 진학했을 때 거기 교과서가 모두 일어로만 되어 있었다. 일어를 모르면 상급학교 진학이 전혀 불가능했던 것이 당시의 교육계 실정이었다. 이전에는 체조 시간이면 대한제국 군대 장교 출신 체조 교사 아래서 독립군가를 배우며 목총을 들고 실제 군사훈련과 흡사한 훈련을 받던 상무의 기상이 넘치던 학교가 명동이었다. 그러나 내가 다니던 무렵엔 주위여건과 세월의 변화에 따라 학교의 분위기도 바뀌었다. 이젠 보다 문학 쪽에 가까워 졌다. 어학만도 조선어, 중국어(1915년에 발표된 중국 정부의 ‘교육법’에 따라 반드시 가르쳐야 하는 정규과목이었다), 일본어 3개 국어를 배워야 했다. 그리고 나의 학급은 특히 문학소년반이라고 할 수 있는 분위기였다. 명동소학교 4학년 때 나는 벌써 소년소녀들을 위한 월간잡지를 구독했다. 내 고종사촌이며 동갑인 송몽규란 친구가 있었는데, 나와 그는 서울에서 월간잡지를 구독해서 함께 읽었다. 5학년이 되면서 나와 몽규의 발기로 다른 친구들도 월간잡지를『새 명동』이란 이름으로 몇 호 발간하였다. 나는 1931년 3월 20일에 명동소학교를 졸업했다. 졸업 후 나는 명동에서 동쪽으로 10리 떨어진 대랍자(大拉子, 화룡현 현청 소재지)에 있는 중국인 소학교 6학년에 편입했다. 이 학교에서의 추억이 시「별헤는 밤」에서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 하나 하나에 붙여준 패(佩), 경(鏡), 옥(玉)이란 중국 소녀들의 이국적인 이름들 속에 녹아 있다.
북간도에서의 1930년대. 그 시절은 사상 문제뿐 아니라 경제와 정치적으로도 거친 회오리 속에 휩쓸렸다. 1929년 미국 뉴욕 주식거래소에서 주가가 폭락하면서 시작된 세계 대공황의 여파가 북간도에도 곧장 밀려왔다. 1930년 가을 곡식 가격이 폭락한 것이다. 공산당은 더욱 크게 득세했다. 이어 정치, 군사적인 대격변이 잇달았다.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켜 본격적으로 만주 침략에 나선 일본이 동삼성과 열하 및 내몽고 동부를 판도로 하는 ‘만주국’이란 이름의 괴뢰국을 세우고,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였던 부의(傅儀)를 명목상의 통치자로 앉힌 것이다. 북간도는 이리하여 ‘만주국’의 영토에 속하게 되었다. 한인들로서는 더욱더 힘든 시절이었다. 나는 1932년에 명동에서 북쪽으로 30리 떨어진 용정이라는 소도시의 미션계 학교인 은진(恩眞)중학교에 입학하였다. 그것을 계기로 농토와 집을 소작인에게 맡기고 용정으로 이사하였다. 마을에서 제일 큰 기와집에서 넉넉하게 살다가, 20평짜리 초가집으로 옮겨온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런 일에 별 영향을 받지 않았다.
1935년에 들어서서 은진중학교 3학년을 수료한 후, 큰 변화가 일어났다. 나는 생전 처음으로 집을 떠나 본국에 들어가서 평양 숭실중학교에서 공부하는가 하면, 송몽규는 독립운동에 투신하기 위해 중국으로 몰래 잠입해 들어갔다. 이런 변화들은 나의 일생에 아주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그 중에서 특히 송몽규의 독립운동 투신 경력은, 훗날 나의 체포와 옥사에 결정적인 원인으로 작용했다. 또 주목할 것으로서 ‘송몽규의 산춘문예 당선’ 사실이 있다. 송몽규는 1934년 12월에 시행된 의 신춘문예 작품 모집에 응모하여 콩트 부문에 당선했다. 작품명은「술가락」. 아직 미성년자인 그가 일반인들과 겨뤄야 하는 국내 저명 신문의 신춘문예에 응모하여 ‘당선’이란 성과를 올린 것이다. 이 일은 나에게 문학적 자극이 되었다. 내가 ‘자기작품’을 소중히 챙기고 그것을 쓴 날짜를 명기해가며 정리하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 때 받은 문학적 자극 때문이다.
당시엔 중학교라 하면 ‘5년제’가 정규 학제였다. 그래서 그보다 수업연한이 1년 짧은 4년제 중학교를 나오면 고등학교나 전문학교, 또는 대학 예과 등의 상급학교로 진학할 때 매우 불리했다. 그런데 5년제 중학교들은 4학년 때까지만 편입생을 받아들였다. 그러니 3학년을 수료한 시점에서, 4학년 첫 학기가 시작되기 전에 5년제의 새 중학교로 옮겨갈 수속을 마쳐놓아야 했다. 당시 용정에서는 친일계통의 ‘광명학원’ 중학부가 유일한 5년제 정규중학교였다. 그러나 광명은 친일 학교였기에 민족의식이 있는 집안, 특히 기독교 계열에서는 상당한 경제적 부담을 감수하면서도 평양의 미션계 숭실중학교(5년제)로 전학시켰다. 1935년 봄, 새 학기가 되자 급우들의 자리가 여기저기 비었다. 나도 물론 숭실중학교로 전학하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고, 결국 4학년 가을학기에 전학하기로 어른들을 설득했다. 그런데 막상 전학하는 과정에서 뜻하지 않게 내 생애 최초의 큰 좌절을 겪었다. 내가 숭실의 편입시험에서 실패한 것이다. 시험 결과로는 3학년으로의 편입 자격밖에 인정하지 않았다. 그것은 ‘낙제’한 것과 같은 결과가 되는 것을 의미했다. 나는 물론 매우 낙심했다. 하지만 의연히 참고 견디기로 했다. 아마 내 가족들도 여기에 대해 큰 상심이 있을 것 같다. 그 점이 너무나 죄송스럽다. 그리고 고구려의 옛 도읍이었던 큰 도시 평양과 새 학교 숭실의 생활에 적응해 갔다.
당시 내 상황은 참담할 지경이었다. 은진중학교로 되돌아가면 제 학년에 다닐 수 있었다. 그러나 4년제를 졸업하게 되어 학제문제가 그대로 남게 되고, 또 되돌아가는 것은 너무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평양에 그대로 남아 한 학년 아래로 편입하는 것은 그보다 더한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게다가 경제문제로 봐도 심히 낭패스러운 일이었다. 시험에 떨어졌다는 오로지 내 잘못 때문에 부모로 하여금 1년간이나 학비를 부담하게 만들었다. 내가 떨어지지만 않았으면 전혀 불필요했을 시간과 금전의 낭비. 내 실패가 부조리한 것일수록 내 고통은 더 크고 수치는 더 깊게 느껴졌다. 그러나 나는 내 수치 앞에서 정직했고 성실했다. 이런 마음이 반영되어 나는 서시라는 시를 완성할 수 있었고 내 자신을 되돌아 볼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내 수치를 직시하는 그 자리에서, 나는 끝없이 부끄러울 수밖에 없는 우리 인간의 불완전성을 보았다.
숭실 생활은 나의 시 공부 과정에서 새로운 전기가 되었다. 생전 처음으로 객지라는 환경과 심각한 갈등과 고뇌를 겪은 것이 오히려 나의 시 세계를 활짝 열어주었다. 나는 1935년 12월에 동시「조개껍질」을 썼다. 내 시에 있어서도 놀라운 변화라고 볼 수 있다. 쉬운 말로 구체적이고 진솔하게 감정을 엮어가려고 노력했다. 나는 이 당시 정지용을 제일 좋아했다. 평생 중에 아마 내가 제일 좋아한 시인으로 꼽을 수 있을 수 잇을 것이다. 『정지용 시집』에서 ‘동시’란 장르가 차지했던 위상 때문에 나는 그의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내게 있어 숭실 시절이 갖는 의미는 결국 ‘시에 대한 경도(傾倒)와 개안(開眼)’, 바로 그것이었다. 이러한 숭실 시절은 불과 7개월만에 막을 내렸다. 그것은 우리 근대 민족사의 쓰라린 상처인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와 직결된 고통이며 결단이었다. 나는 1936년 3월 말에 숭실학교가 신사참배 거부 문제로 폐교되어 관에 접수되자 고향 용정으로 돌아와 5년제인 광명학원 중학부 4학년에 편입했다.
용정으로 돌아온 나는 문익환과 함께 1936년 4월 새학기 초에 나란히 광명학원 중학부에 편입했다. 당시 용정에는 남자 중학교로는 은진(기독교계), 대성(大成, 민족주의계), 동흥(東興, 사회주의계)과 광명(光明, 친일계), 이렇게 네 학교가 있었다. 세 학교는 반일 계통이며 4년제 학교였고, 광명이 유일한 5년제 학교이자 또 유일한 친일계 중학교였다. 그러나 광명 역시 처음부터 친일계로 출발한 학교는 아니었다. 전신은 1912년에 설립된 기독교 학교인 영신(永新)학교로서, 1924년의 흉년 여파로 심각한 경영난에 빠지게 되었고, 결국 일본인 일고병자랑에게 매각되었다. 일고병자랑은 소위 ‘대륙낭인(大陸浪人)’들 중의 하나였던 괴상한 걸물이었다. ‘대륙낭인’은 ‘일본제국의 대륙 진출’이라는 목적 달성을 위해 아시아 각국에 보이지 않는 손을 강하게 내뻗고 있던 무리들이었다. 일고병자랑은 중학부, 고등여학부, 소학교, 유치원의 4학교로 구성된 ‘광명학원’이 일본 문부성의 ‘재외지정’ 학교가 되도록 손을 썼다. 문익환은 이 학교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일인 선생들은 눈알이 제대로 박힌 학생들이면 일본 외무성 순사나 만주육군사관학교에 보내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그런 학교였다.” 만주국 육군사관학교는 약칭으로 만주군관학교 또는 만군사관학교라고 불렸고, 만주군관학교를 나오면 만군 장교가 된다. 만군은 일제의 대륙 침략의 도구였던 군대이다. 후일 우리 현대 정치사에서 소위 ‘만군 인맥(滿軍人脈)’으로 불리는 사람들이 주류가 된다. 요직에 앉은 만군 출신 고위 장교들의 상당수가 역시 만군 출신인 박정희의 516 쿠데타에 동참하여 제3공화국의 주역으로 등장했었다. 그래서 516 주체 세력 중엔 용정 광명중학 출신이 많았다. ‘광명’은 이런 내력을 가진 학교였다.
소학교, 중학교에서조차 일본어로만 교습해야 하고 신사참배를 거부하면 학교가 폐교되는 그 숨막히는 상황 속에서, 기독교계 학교들은 다른 계통의 학교들보다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와 학풍을 누렸다. 그렇기에 학교 건물들의 장식 무늬로 태극 마크를 새겨 넣거나, 캠퍼스에 한국을 상징하는 꽃 무궁화가 만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연희전문은 1915년 4월에 문을 열었으며, 미국 선교부 연합위원회의 관리 아래 기독교 교육의 본산역할을 했다. 연전 개교이래 최대의 위기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