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명에 불타는 부흥 사이 성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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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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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사명에 불타는 부흥사 이성봉
1. 한국 교회의 부흥 운동
한국 교회의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는 부흥회 운동이다. 1907년부터 시작하여 1910년대가 길선주 목사를 중심으로 한 부흥 운동의 시대였다고 한다면 1920년대는 김익두 목사의 시대였다.
1930년대 이후 한국 교회 부흥 운동의 제3세대 중심 인물은 바로 이성봉 목사이다. 그는 한국 교회의 가장 심각한 시련기인 일제 말기의 고난과 해방, 6 25 사변을 잇는 형극의 시대에 복음의 횃불을 들었다. 그는 특히 나환자 병원을 비롯하여 여러 곳을 돌며 복음을 전하였다. 그의 메시지는 회개와 이로 인한 감격에 중점을 둔 아주 소박한 것이었다. 힘든 세상을 사는 사람들에게 설교하였지만, 염세적이라기보다는 일상 생활에 충실하라는 메시지가 중심이었다.
2. 이성봉 목사의 생애
(1) 신앙 형성
이성봉은 평안남도 강동군 간리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평범한 서민이었지만 당시 대부분의 백성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그의 가정은 매우 빈곤하였다. 하지만 그의 가족은 이성봉이 어렸을 적 평양으로 이사하여, 평양 선교리 감리교회에 출석하였다. 40리나 떨어진 곳이었으나 온 가족이 한 번도 빠짐없이 교회에 출석하였다. 이성봉은 6세에 복음을 받아들여 예수를 믿었고, 그 해에 신약성서를 일독하였다. 황해도 신천 장로교회 김익두 목사가 그의 어머니를 경신 소학교의 선생으로 3년간 일하게 해주었고, 이때 이성봉도 그 학교에 가서 14세에 졸업을 하였다. 당시에 이성봉은 김익두 목사에게 많은 감화를 받아 장차 김익두 목사처럼 부흥사가 되겠다는 꿈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소학교를 졸업한 이성봉은 중학교에 갈 수 있는 형편이 안 되어 외가에 가서 농가일을 거들었다. 이로 인한 열등감과 낙심 때문에 이성봉의 생각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다. 교회 생활 속에서 그는 천국과 지옥도, 심지어 하나님의 존재도 회의를 느낄 정도까지 이르렀다. 그러던 그가 21세가 되던 해에 골막염으로 6개월간 병원에 입원하면서 생에 변화가 찾아왔다. 병상에 누워있는 동안 이성봉은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기 시작하였고 다시 예수를 믿게 되었다. 의사는 다리를 잘라야 한다고 진단하였지만 신앙을 회복하면서 이 불치의 병도 고침을 받았다. 그는 인생과 죽음에 대해 깊이 숙고하게 되면서 인생이 죽음 앞에 허무함을 노래하고 하나님 앞에서 회개할 기회를 갖게 된 것이다.
(2) 신학 훈련과 목회
이성봉은 1925년 3월, 25세의 나이로 경성성서학원에 입학하였다. 당시 경성성서학원은 성결교회의 가르침에 따라서 중생, 성화, 신유, 재림의 소위 ‘4중 복음’을 가르쳤다. 이성봉은 이미 회개하고 거듭났지만 성서학원에서는 더욱 철저한 회개를 강조하였다.
1928년 3월 졸업한 그는 1937년까지 수원 성결교회, 목포 성결교회 그리고 신의주 성결교회에서 목회 활동을 하였다. 1932년에는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의 목회 생활에서 한 사람 한 사람은 구원을 얻어야 할 귀중한 사람이었다. 만나는 사람들마다 애절한 마음으로 복음을 전하였다. 그는 또한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살았던 하나님 제일주의 목회자였다. 철저한 사명감으로 생명을 내놓고 최선을 다한 그의 목회는 가는 곳곳마다 승리를 얻을 수 있었다. 또한 그는 복음을 전할 뿐만 아니라, 복음 전도의 요람이라 할 수 있는 예배당을 짓는 일에도 최선을 다하였다.
(3) 부흥사로서의 삶
1937년 봄, 교단 총회에서 이성봉은 전국 교회를 위한 부흥사로 임명을 받았다. 이때부터 그는 부흥사로 전국을 다니며 교회의 부흥을 위하여 말씀을 전하는 일에 헌신하였다. 그는 순회 전도자로 전국 방방곡곡 크고 작은 교회를 가리지 않고 그를 원하는 교회면 어디든지 찾아다니며 자신의 사명인 복음을 전하는 일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의 부흥 사역은 하나님의 역사가 같이하여서 큰불이 일어나고 예수의 향기가 진동하였던 사역이었다.
그의 부흥 사역은 점차 확대되어 성결교뿐만 아니라 장로교, 감리교에서도 대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성결교에서 이성봉에게 타 교파에는 가지 말라는 지시를 내렸고 이는 그를 매우 괴롭혔다. 그러나 그는 교파의 구별 없이 봉사하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생각하고 교단의 명령에 불응하였다. 결국 이 같은 갈등으로 부흥사로 활동한지 1년 만인 1938년에 부흥사 임직을 마치게 되었다.
(4) 민족사의 질곡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