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각의 제국 집착과 광기 비극 속의 카타르시스

 1  감각의 제국 집착과 광기 비극 속의 카타르시스-1
 2  감각의 제국 집착과 광기 비극 속의 카타르시스-2
 3  감각의 제국 집착과 광기 비극 속의 카타르시스-3
 4  감각의 제국 집착과 광기 비극 속의 카타르시스-4
※ 미리보기 이미지는 최대 20페이지까지만 지원합니다.
  • 분야
  • 등록일
  • 페이지/형식
  • 구매가격
  • 적립금
자료 다운로드  네이버 로그인
소개글
감각의 제국 집착과 광기 비극 속의 카타르시스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집착과 광기, 비극 속의 카타르시스
포르노그라피와 예술의 경계를 허물었다는 평가를 받은 오시마 나기사 감독의 걸작 (1976년)이 국내에 개봉이 되었고 물론 온전한 형태로는 아니다. 포르노라고 여겨질 만한 장면들은 모두 거세되었다. 안타깝게도 원판에서 무려 16분을 잘라냈다고 한다. 그리하여 파시즘의 폭력에 맞서 성의 정치학으로 대항하고자 했던 감독의 의도가 상당부분 희석되었다. 권위적인 검열의 잔재와 상업성의 눈먼 장삿속이 어우러진 결과였다. 이렇게까지 불구로 만들어서 개봉을 해야 했을까?
어쨌든 개봉이 결정된 마당에 이 작품이 갖고있는 영화사적 의의에 대해서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거론하는 영화는 불구가 된 국내 버전이 아니라 유럽 버전임을 먼저 밝혀둔다. 오시마 나기사는 왜 이처럼 도발적인 영화를 만들었을까? 이후 음란과 외설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본격 포르노물들을 제외하고는 이 영화의 대담성에 필적하는 영화는 없었다. 장선우 감독의 이 제아무리 도발적이라하나 이 영화에 비하면 그야말로 새발의 피다. 우선 부엇보다도 에서의 정사장면은 실재 상황이라는 점이다. 남녀 주인공을 맡은 이시다 기치조(후지 다쓰야 분)와 아베 사다(마쓰다 에이코 분)는 포르노 배우를 무색케하는 연기를 펼쳤다.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에 등장한 전후 세대의 일본영화감독은 이른바 새로운 물결(누벨바그)을 형성했다. 이 시기에 일본에서는 산업화 도시화 기술관료화가 극에 달하여 사회는 급격한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고 전통의 해체가 촉진되었다. 이러한 시기를 대표하는 가장 영향력이 있는 감독이 바로 오시마 나기사다. 그는 1960년 쇼지쿠 영화사에서 라는 영화를 만들었는데, 너무 정치적이라는 이유로 제작이 중단되고 말았다. 그후 쇼지쿠를 떠난 오시마는 1969년 재일한국인 문제를 우화적으로 다룬 이라는 영화를 필두로 해서 (1969년), (1970년)들과 같은 문제작들을 주로 만들었다.
오시마 나기사의 명성을 세계에 알리게 된 결정적인 작품이 바로 이다. 이후 그는 비슷한 주제의 이라는 영화를 만들기도 했는데, 겉으로는 포르노그래픽적 전략을 택하고 있는 이들 영화를 통해서 오시마는 기술 관료화된 일본 사회의 경직성에 대해 강한 비판을 제기하고 있다. 요컨대 그는 근대화라는 미명하에 다시금 파시즘으로 치닫고 있는 일본사회의 무질서에 대해서 아주 격렬하게 또한 가치전복적으로 비판의 메스를 들이대고 있는 것이다.
사실상 영화의 내용은 무척이나 단순하다. 지식인적인 면모를 풍기는 요정 주인 이시다 기치조와 종업원이었던 아베 사다간에 벌어지는 열정적인 섹스 행각이 영화의 주된 내용이다. 1936년에 일본에서 일어난 아베 사다 사건을 소재로 하고 있는 이 영화는 어떤 현란한 스타일과 관음적 볼거리에 치중하기보다는 실제의 정사장면을 그저 담담하게 다큐멘터리처럼 보여줄 따름이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포르노라고 낙인찍힌 이유는 성기 결합은 물론이고 오랄 섹스 후의 사정 장면 등을 여과 없이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장면들은 물론 국내 버전에서는 볼 수 없다.
두 사람간의 정사가 횟수를 더해가면서 점점 가학-피학적으로 된다는 점에서 과 비슷하지만 강도에 있어서는 훨씬 충격적이다. 결국 아베 사다가 기치조의 목을 졸라 죽이고 그의 성기를 자르는 지경에까지 이른다. 경찰에 체포된 사다는 더할나위없이 행복한 표정이었다. 사랑하는 남자를 완벽하게 소유했다는 데서 오는 희열(喜悅)이었다.
그렇다면 하필이면 왜 포르노를 방불하게 하는 섹스인가? 파시즘의 발흥은 인간의 의식마저도 억압하는 극단적인 폭력구조라고 할 때, 진정 자유로울 수 있는 공간은 다름 아닌 인간의 육체다. 극도의 에로티시즘을 통한 육체의 희열만이 억압적인 군국주의에 맞선 유일한 출구였던 셈이다. 오시마 나기사는 파시즘의 총칼이 아니라 감각으로 지배되는 제국을 꿈꾸었던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영화를 본 후 관련자료를 검색해 보면서 알게된 사실인데, 사실 오시마 나기사 감독도 이 영화를 포르노로서 만들었다는 것이다. 영화 속의 섹스는 왜 실제 행위가 아닌 연기로만 표현되어야 하는가 고민해왔던 감독은 영화란 욕망을 시각화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고, 이러한 감독의 고민은 포르노에 대한 금지가 풀린 당시 칸느영화제의 상황과 프랑스의 자유로운 영화제작 환경과 맞물려, 프랑스일본 합작 포르노인 감각의 제국을 탄생시킨 것이다.
이 영화를 포르노라고 규정하면서도 내심 걸리는 것이 있는데, 바로 이 영화의 예술적인 가치에 대한 부분이다. 사실 이 영화를 단지 눈요기용으로 만들어진 저급 포르노만으로 규정하기는 힘들다. 왜냐하면 분명 성을 통해 1930년대의 일본 제국주의를 조롱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으며, 형식적으로도 결코 엉성하게 만들어진 영화가 아니기 때문이다. 만일 성정치학을 하는 사람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 영화만큼 탁월한 영화가 없을 정도이니까 말이다. 이를 통해 오시마 나기사의 탁월한 점 하나를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그가 감각의 제국을 통해 포르노와 예술의 성격을 모두 지닌 영화를 만들어냈다는 점일 것이다.
나는 자꾸 의문이 든다. 제국주의와 정상적인 성을 전복하고 조롱하기 위한 목적으로, 과연 이와 같은 방법과 표현까지 동원할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의문 말이다. 오시마 나기사는 포르노란 볼 수 없도록 금지됨으로써 비로소 포르노가 된다고 하였는데, 감독의 의도처럼 감각의 제국은 그 오랜 세월동안 일본을 비롯한 수 많은 국가에서 상영이 금지됨으로써 의도했던 포르노서의 지위를 성취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 나라 영화관에서도 상영된 바 있는 이 영화는, 더 이상 포르노가 아니란 말인가?
제작자와 감독의 의도로서만 영화의 예술적 가치를 평가할 수는 없다. 극단적인 예를 들어, 산 속의 바위 덩어리 하나를 아무렇게나 떼어와서 미술관에 전시해 놓고, 고뇌하는 현대인이라는 명칭을 붙여 예술적 가치를 부여하고 감상대상으로서의 가치를 부여하는 일과 같이 우스꽝스러운 행위를 과연 합리화할 수 있을까? 마찬가지로 분명 포르노인 것을 예술적인 형식으로 잘 포장하여, 나름대로 의미 있는 내용을 담아서 내놓았으니 알아서들 보시오 하는 것이 과연 예술을 하는 사람으로서 타당한 것일까?
결코 아닐 것이다. 이는 결국 예술로써 예술의 무덤을 파는 행위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예술로서의 가치가 의심되는 많은 현대예술작품들이야말로 바로 이와 같은 상황을 스스로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예술은 인간성을 살리고 인간을 보다 풍요롭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한 점에서 현대예술은 엄연히 회복되어야 할 대상이다.
감각의 제국이 뜨겁다고 할 때, 이 뜨거운 감각의 제국은 우선 차가운 권력의 제국이 쌓아 놓은 경계의 벽과 정면으로 대립된다. 차가운 권력의 제국이 경계의 벽을 쌓으려 할 때 확실하게 동원되는 일꾼은 무엇일까? 몇몇 현실적인 사회 권력의 중심에 서 있는 구체적인 인물들은 막일꾼이라고 한다면, 그 막일꾼들을 은근히 지도하는 관리 일꾼은 바로 합리적 사유이다. 뭇 인간들의 몸을 관리해서 사회 권력의 강화를 꾀하려 할 때, 가장 먼저 요구되는 것은 어떤 방식으로 건 정당성을 확보해야 한다. 이에 가장 편리하고 강력한 도구가 바로 이성적 사유이다. 뭇 몸들뿐만 아니라 몸에서 뿜어 나오는 또는 몸을 통해 진동하는 뭇 감각들을 권력의 탄생과 강화에 봉사하도록 만드는 근원적인 힘이 바로 이성적 사유인 것이다. 이성적 사유가 모든 사람들이 긍정할 수 있고, 따라서 모든 사람들이 따라야 하는 보편적인 규칙을 알 수 있고 내세울 수 있는 인간만의 고유한 능력으로 정의되는 이성적 사유. 이 정의에 이미 권력의 냄새가 가득 배어 있다. 미리 말해 만약 이성적 사유가 자신의 정의에 배어 있는 권력의 냄새를 지우고자 한다면, 이성적 사유는 자신의 오만함으로 제거해버린 자신의 모태인 비 이성의 몸 감각의 영역을 회복해야 한다. 그리고 거기에 자신의 거대한 뿌리가 심겨져 있음을 절실하게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정신적인 이성적 사유는 이미 구축해 놓은 자신의 성과 영토를 스스로 포기할 수 있는 힘은 갖지 않고 있다. 자신의 통치 구역을 물샐 틈 없는 견고한 불멸의 제국으로 만드려는 데에 몰두하고 있을 뿐이다. 여기에 구멍을 내어 뜨거운 해가 이글거리며 데워 놓은 뜨거운 물을 흘러 보낼 수 있는 힘은 오로지 전신적인 감각밖에 없다. 하지만 당연히 볼 수 없는 즉 직접 느낄 수 없는 전신적인 감각의 흐름은 거센 반발과 억압을 당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성적 사유는 자신의 짝패인 금기의 사회적 권력 체계를 동원하여 누구나 쉽게 편안하게 문제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감각만을 허용하려 한다.
영화 전반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주인공들, 여주인공 사다와 상대역 키치의 대사는 "느낄 수 있어?"였다. 서로의 육체를 탐닉하면서 그 두사람은 식음을 전폐하다시피하며 모든 것을 감각에 의존하며 살아간다. 그렇다면 제국이란 말은 왜 끼어든 걸까. 이 영화의 시대적 배경은 한창 제국주의 일본이 아시아 제패에 열광하고 있던 1930년대 말이다. 제국주의 일본은 끝없는 욕망에 사로잡혀 있었고 그 소유욕은 거의 광적인 것으로써 많은 이들의 생명을 앗아갔으며 나중에는 자멸의 길을 걸었다. 20세기초의 일본 제국주의를 비롯한 모든 제국주의, 또는 군국주의가 멸망에 이르렀듯이 영화 속의 두 주인공들의 병적인 관계도 결국엔 파국으로 치달을 것임을 제목을 통해 상징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한 이성에 대한 광적이고 편집증적인 사랑을 소재로 하는 영화는 감각의 제국 말고도 여러 편이 있다. 한 중년남자의 어린 소녀에 대한 사랑을 그린 롤리타나 여운동 감독의 미인 그리고 최근 개봉작 베티 블루에서도 집착과 광기어린 사랑의 감정 또는 감각을 주체하지 못해 이와 같은 파국을 부른다. 그러나 역시 이들 영화의 공통점은 모두들 자신의 행한 일이 비극을 초래했지만 그 일에 대해 후회는 없었고 오히려 그로부터 위로와 안식을 얻었다는 점이다.
영화 감각의 제국은 인간이 정말 저럴 수가 있을까 하며 섬뜩함을 주기도 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