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의 주문에서 깨어나 기아 이즈 와이드 셔과 함께 라캉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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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환상의 주문에서 깨어나 기아 이즈 와이드 셔과 함께 라캉을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환상의 주문에서 깨어나기
:과 함께 라캉을
▶대타자는 어떤 존재인가? 상징적 질서의 익명적 메카니즘인가? 아니면 극단적인 이질성속의 다른 주체, ‘언어의 벽’ 때문에 나와는 영원히 분리된 채 존재하는 다른 주체인가?
라캉 이론의 발달 과정(초기의 현상학에서 후기의 구조주의로의 이동)을 관찰함으로써 읽어낼 수는 있지만, 그것은 대타자의 핵심적인 신비를 놓친다. 그 신비란, 익명의 상징적 질서가 주체화되는 지점을 말한다.
라캉의 공식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인간은 타자로서 욕망한다.”라는 말은 무엇보다 인간의 욕망은 ‘탈중심화된’ 대타자, 상징적 질서가 구조화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욕망하는 것은 대타자, 즉 내가 거주하고 있는 상징적 공간에 의해 미리 결정되어 있다.
“인간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다.”라는 문장에는 또 다른 의미도 있다. 주체는 타자 자체를 욕망하는 존재로 경험하는 한에서만, 타자를 불가해한 욕망의 자리로 경험하는 한에서만, 불투명한 욕망이 그, 그녀로부터 발산되는 것을 경험하는 한에서만 욕망한다.
▶우리는 타자의 심연이 과도하게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외상적 충격을 어떻게 피할 수 있을까? 우리는 타자의 욕망과 대면함으로써 야기되는 불안(anxiety)에 어떻게 대처할 수 있을까?
라캉에 따르면, 환상이 타자의 수수께끼 같은 욕망에 대한 대답을 제공한다. 환상에 대해 기억해야 할 점은 환상은 우리에게 어떻게 욕망할 것인지를 가르쳐준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덧붙여야 할 것은 환상에서 상연되는 욕망은 주체의 것이 아니라 타자의 욕망, 내 주위에서 내가 관계 맺는 사람들의 욕망이라는 점이다. 환상, 혹은 환상적 장면 내지 시나리오는 “너는 그것을 말하고 있지. 하지만 네가 그렇게 말하면서 실제로 원하는 것은 뭐지?”에 대한 대답이다. 욕망의 근원적 질문은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내게 원하는 것은 무엇이지? 그들이 내 안에서 보는 것은 무엇이지? 나는 그들에게 무엇이지?”다.
환상은 이 수수께끼에 대한 답을 제공한다. 딸기 케이크를 먹는 환상은 실제로는 (부모가 준 케이크를 맛있게 먹는 아이와의)동일성을 형성하려는 시도에 관한 것으로, 그것은 부모를 만족시켜서 자신을 그들의 욕망의 대상으로 만들어준다.
환상 스크린, 실재적인 피와 살로 이뤄진 타인과의 어떠한 접촉, 다른 인간존재를 만지면서 느끼는 어떠한 성적 쾌락도 명백한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외상적인 것으로, 주체의 환상 프레임 안으로 타인이 들어오는 한에서만 유지될 수 있다.
▶그렇다면 근본적으로 환상이란 무엇인가?
환상의 존재론적 역설, 혹은 추문적이기까지 한 역설은 그것이 ‘주관적’인 것과 ‘객관적’인 것의 표준적인 대립을 뒤집는다는 사실이다. 물론 환상은 정의상(주체의 인식과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의미에서) 객관적이지 않다. 하지만 환상은 또한 (주체가 의식적으로 경험한 직관에 속하는 어떤 것, 그, 그녀의 상상의 산물이라는 의미에서) 주관적이지 않다. 오히려 환상은 “객관적으로 주관적이라는 이상한 범주(사물이 네가 보는 방식으로 보이지 않음에도 실제적이고 객관적으로 네게 보이는 방식)에 속한다.
2003년 5월 럼즈펠드는 알려진 것과 알려지지 않은 것의 관계에 대해, “알고 있는 앎(known knowns, 내가 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 “알고 있는 무지(known unknowns, 내가 알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는 것.)”, “모르는 무지(unknown unknowns, 내가 알지 못한다는 걸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말했다. 그러나 여기에 네 번째 항인 “모르는 앎(unknown knowns)”이 추가되어야 한다. 내가 안다는 걸 모르는 것들-이것은 정확히 프로이트가 말한 무의식, ‘알려지지 않은 지식’으로, 라캉은 그런 지식의 핵심을 환상이라고 불렀다.
이것은 또한 라캉이 주체는 언제나 ‘탈중심화’되어 있다고 말하면서 전달하고자 했던 생각의 구체적 사례 중 하나다. 그의 요점은 내 주관적 경험이 자기 경험 외부에서 내 통제를 넘어서는 객관적이고 무의식적인 메커니즘으로 조종된다는 것이 아니라, 훨씬 전복적인 것이다. 즉 나는 내 가장 내밀한 주관적 체험, 사물이 ‘실제로 나에게 보이는’ 모습, 내 존재의 핵심을 구성하고 보증하는 근원적 환상을 빼앗기게 된다. 왜냐하면 나는 결코 그것을 의식적으로 경험하지도, 확신하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프로이트가 말한 무의식의 주체는 주체가 (자기) 체험하는 핵심 측면(그의 근원적 환상)이 그에게 접근 불가능한 게 될 때, 원초적으로 억압될 때 출현한다. 가장 근본적인 차원에서 무의식이란 접근 불가능한 현상이지 내 현상학적 체험을 규제하는 객관적 메커니즘이 아니다. 그래서 어떤 실체가 우리의 내면적 삶(외면적 행위로 소급될 수 없는 환상적 체험)의 징후를 드러내는 순간 우리는 주체를 만나게 된다는 통속적인 생각과 반대로, 인간의 주체성을 특징짓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라캉이 말한 것처럼 이 접근 불가능성이 주체를 ‘텅 비게’ 만든다.
주체의 존재 속에 있는 환상적 중핵으로부터 그, 그녀의 상징적이거나 상상적인 동일시를 영원히 분리시키는 간극이 있다. 내가 내 존재의 환상적 중핵을 (상징적으로 통합한다는 의미에서)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내가 그 중핵에 너무 가까이 접근하거나 그것에 너무 많이 다가갈 때 라캉이 주체의 “소거”(자기 말소)라 부른 현상이 발생한다. 그리고 아마도 내 존재의 환상적 중핵이 사회적 현실에서 강압적으로 실현되는 것은 가장 나쁜 것으로, 그것은 가장 모욕적인 폭력, 내 (자기 이미지와의) 동일성의 기반 자체를 붕괴시키는 폭력이다.
꿈속에서 대면한 실재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현실로 깨어난다는 라캉의 생각은 성행위에 관련된 곳이라면 어디든 적용된다. 섹스를 할 수 없을 때 우리는 섹스에 관한 꿈을 꾸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를 덮칠지도 모를 꿈의 과잉성을 억누르기 위해, 그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섹스를 하는 것이다. 라캉에게 궁극적인 윤리적인 과제는 진정한 깨어남이다. 단지 수면으로부터의 각성이 아니라, 깨어 있을 때보다 더 우리를 지배하는 환상의 주문에서 깨어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