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개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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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개석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1)장개석 출생과 교육배경
장개석은 1887년 10월 31일 절강성 봉화현(奉化縣)에서 아버지 장조총과 어머니 왕채옥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장개석이 9세 때 부친이 사망하여 그의 가정형편은 어렵게 되었고 홀어머니 슬하에 자란 장개석은 이러한 까닭으로 인생관과 생활습관에 있어 모친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장개석은 6세때부터 16세 소년기까지 고향의 여러 사숙(私塾)을 옮겨 다니면서 여러 스승에게서 전통 한학을 공부하였다. 그는 소년기에 이미 중국의 전통 학문과 사상에 대한 상당한 수준을 쌓았는데, 이는 훗날 그의 민족주의적 성향과 중국의 전통적 가치를 중히 여기는 데 바탕이 되었다.
장개석은 14세가 되던 해 당시 관행대로 어머니가 정해 준 5년 연상의 모복매(模福梅)와 결혼하였다. 장개석은 17세 때부터 신식교육을 받기 시작하였다. 그는 봉화현의 봉록학당(鳳麓學堂)에 입학하여 영어·산학·이화학 과목 등을 배웠고, 다음해 영파(寧波)의 전금공학(箭金公學)으로 전학하였는데 거기서 고청렴(高淸廉 )선생을 만났다. 그로부터 손문의 혁명운동과 구미 선진국에 대하여 듣고 손문을 존경하고 혁명에 투신할 뜻을 세우게 된다. 또한 이 때부터 군사학을 배울 생각을 하게 되는데 1906년 20세가 된 장개석은 봉화의 용진(龍 津)학교로 전학하여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3개월만에 변발을 자르고 군사학을 배우러 일본에 가지만 자격 미달로 강유위(康有爲)가 동경에서 시작한 청화(淸華)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일반 학교인 청화학교에 오래 다닐 수 없었던 장개석은 같은 해 겨울 누이동생의 결혼으로 왕부인의 부름을 받아 귀국하게 된다. 1년도 채 다니지 못했지만 청화학교에서 장개석은 일본어를 배우고 동경의 많은 중국인 혁명지사들과 사귀게 되었으며 손문의 측근 진기미(陳其美)를 알게된다. 장은 혁명지사들과 교류하면서 중국혁명운동에 참가하게 되었고, 진기미를 통해 중국혁명의 아버지 손문을 만나게 되는 등 청화학교에서의 1년은 그의 일생에 대단히 중요한 기간이었던 것이다.
21세 되던 1921년 여름 청정(淸廷)이 하북성 보정(保定)에 설립한 통국육군속성학교(通國陸軍速成學校)에 입학하여 1년 동안의 수업을 마치고, 육군의 일본유학생으로 선발되어 1908년 봄 일본 육사의 예비학교인 무진학교(武辰學校)에 정식으로 입학하였다. 무진학교에서의 3년 동안 군사학의 신지식을 얻는 동시에 강건한 신체단련, 군인정신, 사생관(死生觀)의 도리를 배웠다. 그밖에 왕양명의 서적을 탐독하며 그의 사상에 감명 받아 평생 동안 혁명역정에서 주된 수양의 기초로 삼았다고 한다. 1909년 장개석은 진기미의 소개로 중국 동맹회의 회원이 되고 같은 해 여름 혁명계획을 추진하기 위해 동경에 왔을 때 진기미와 함께 손문을 만나게 된다. 1910년 무진학교를 졸업한 장개석은 니가타현 다카다시 야전포형 13연대의 견습사관으로 배치되었으며, 1년 동안의 고된 훈련을 통해 체력과 의지, 투철한 사명의식을 기를 수 있게 된다.
2) 신해혁명 참가에서 광동 국민정부 실권자로
1911년 10월 장개석은 무창봉기가 일어나자 진기미의 지령을 받아 백여 명의 혁명군을 이끌고 항주를 장악하였고, 이어 호주, 온주, 영파를 함락시켜 정갈성이 독립선언을 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그리고 혁명이 성공하자 상해의 도독이 된 진기미의 오른팔로 제 2사 5단 연대장이 되었다.
혁명 성공 후 그는 군사학을 배우기 위해 다시 일본으로 떠났다가 원세개의 사주로 송교인이 암살(1913)되자 다시 상해로 귀국하여 손문을 만나 제 2혁명에 가담하였다. 그리고 손문과 함께 일본에 망명하여 1914년 상해의 세 번째 혁명계획에 참여하였다. 이때에 장개석은 손문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러던 가운데 1916년 원세개의 자객에게 진기미가 암살되는 사건이 벌어진다. 이것은 장개석이 손문의 후계자로 등장하는 출발점이 되었다. 원세개가 죽자, 이어 10여 년간의 군벌기가 이어졌다. 사회는 어지러웠으나 이 시기 장개석은 손문의 확고한 신임을 얻어 국민혁명군의 핵심 인물이 되었다.
손문은 원세개 사후 임시약법에 따른 민주정의 회복을 기대했으나 단기서의 반대와 장훈의 복벽 소동으로 희망이 보이지 않자, 광주에 중화민국 군정부를 수립하고 북벌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군대를 갖지 못한 손문은 서남군벌들이 자신을 소외시키자 상해로 물러났다.
한편 장개석은 모반의 기미가 있는 진형명에 대해 손문이 처리하자 않자 고향으로 돌아가 있었다. 그러한 때 손문이 진형명에 의해 영풍호에 갇히게 되자 장개석은 손문을 도와 홍콩으로 탈출했다. 이를 계기로 장개석에 대한 손문의 신임을 더욱 깊어졌다.
손문이 상해에서 광주로 돌아와 다시 대본영을 조직하고 정부의 대원수로 복귀하자, 장개석은 대본영 참모장에 취임하게 되었다. 그 뒤 손문에 그에게 중국 국민당 군사 부문의 중임을 잇달아 맡김으로써 당내에서 그의 위상은 빠르게 상승하였다.
당시는 국공합작이 진행되고 있었는데, 소련 원조에 따른 단군의 건립도 약속되어 있었다. 손문은 당군 건립의 핵심 임무를 장개석에게 맡겼다. 그는 황포군관학교의 졸업생들을 중심으로 국민당 제 1의 정예군을 확보하고 광동성 안팎의 적들을 진압하면서 당내에서 가장 막강한 군사 지도자로서 위치를 확보해나갔다. 또한 그는 광동정부에 반기를 든 여러 난들을 평정하고 혁명군의 영웅이 되어, 광주위수사령에 임명되어 광주의 실권자가 되었다.
그러나 남북통일을 위한 방편으로 국민회의를 소집하는 문제에서 손문이 지병인 간암의 악화로 1925년 사망한다. 하지만 곧 왕정위를 주석으로 하는 광동국민정부가 설립되었다. 새 정부가 들어서자마자 국공합작을 둘러싼 좌·우파 사이의 갈등이 표면화 되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장개석은 좌우파 사이에서 중도적 입장 견지했고, 소련 고문관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신뢰를 얻었다. 그리고 2년 동안 정치와 군사의 실권을 장악하고 북벌을 성공적으로 수행, 군벌시대를 끝내고 남경 국민정부를 수립하여 중국의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1925년 요중개가 암살당하는 사건으로 왕정위와 장개석을 제외한 손문의 후계자 후보들이 제거되고 그 결과 당내에서 그의 지위는 급상승하였다. 1926년에는 제2차 국민당 전국대회에서 장개석은 광주위수사령, 제1군 군장에 더하여 당 중앙 집행위원과 상무위원에 추대되어 왕정위와 더불어 국민당 최고의 직위에 오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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