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리장성萬里長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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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만리장성(萬里長城)
만리장성(萬里長城)은 ‘달에서 보이는 지구의 유일한 건축물’로 유명하다. 달에 갔다가 돌아왔던 우주인이나 우주를 날고 돌아온 우주인들의 말들이다. 만리장성은 달에서 육안(肉眼)으로도 식별이 된다고 할만큼 지구의 거대한 건조물이다. 세계의 7대 불가사의중 하나이다. 만리장성은 아주 먼 옛날인 서기 기원전 5세기경 춘추전국(春秋戰國)시대에 한족 여러 나라들이 각기 북방의 유목(遊牧) 기마민족(騎馬民族) \들의 칩입을 대비해서 자기네들 나라의 국경에 장성을 쌓아놓았던 것을 진시황(秦始皇)이 천하를 통일하고 나서 그 각 장성들을 연결시켜 통일된 중국전체의 장성으로 축조했던 모양이다. 그때 만리장성의 원형(原形)이 대강 잡혔던 것 같다. 진시황(秦始皇)은 이때에 연(延) 30만의 군대와 연 수백만의 농민 일반 백성을 동원 했다고 전해진다.
만리장성은 중국대륙의 본토박이인 한족(漢族)이 북방 이민족인 유목민(遊牧民) 기마민족들 즉 흉노족(匈奴族)여진족(女眞族)들이 기마군단(騎馬軍團)으로 쳐들어 올 것을 대비 했던 장성이다. 한족인 명(明)나라가 건국되자, 저 징기스칸(成吉思汗)의 기마군단의 질풍같은 전법을 알고 있었을 명나라는 만리장성을 다시 대대적으로 정비하고 완성시켰다. 지금의 만리장성이 완성된 것이다.
명나라 다음으로 청(淸)나라가 들어서게 되었고 그들 자신들이 북방 유목 기마민족 징기스칸의 후예(後裔)들이었다. 만리장성은 아득히 긴 장성이다. 동쪽 끝 산해관(山海關) 관문(關門)은 발해만(渤海灣)에 닿아있다. 서쪽 끝은 실크로드의 입구인 주천근반의 가욕관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그 총길이가 6천여킬로미터로 옛 계산법으로 1만5천리(里)나 되는 것이다. 우리들도 지금도 4킬로미터를 십리(十里)로 계산하면서 살아오고 있다.
만리장성은 교통의 요충지(要衝地)에 세운 관문과 각 관문들을 성벽(城壁)으로 연결해놓은 것이다. 그 사이에 약 110미터 간격으로 성벽에 붙혀서 봉화대(烽火臺)를 설치해놓고 있다고 한다. 장성 위 통로 폭이 6.5미터에 성벽 높이가 8.5미터의 거대한 성벽이다. 성벽은 중간 어느 지점을 허물고 침입하지 못하게 견고하게 축조되어 있다. 벽돌 하나하나를 이가 딱 맞게 해놓았다. 지렛대를 꽂고 할 틈이 없다. 벽돌 한 장 한 장을 잘 으깬 찹쌀풀로 붙여서 한 덩어리로 축성해 놓았다고 한다. 성벽 위 통로 양쪽으로는 사람 키 높이로 담장을 쌓아 올려놓고 있다. 물론 일정한 간격으로 활을 쏠 수 있는 공간을 시설해 놓고 있다. 감히 기마부대로 침공할 그런 엄두를 낼 사람은 없을 것 같다. 사다리를 놓고 할 그런 성벽이 아니다. 지형상으로도 ‘트로이의 목마(木馬)’ 같은 것을 놓아볼 그런 성벽이 아닐성 싶다. 만약 보병(步兵)들로 침입하려고 하는자들이 있으면 관문(關門) 큰 건물 안에 주둔하는 군사들이 즉각 성벽 위의 넓은 통로를 마음대로 이동하면서 유리한 위치를 의지해서 방어할 수 있다. 또 성벽 돈대(墩臺)에 설치된 봉화대에서는 즉시 정해진 수의 봉화(烽火)불이나 연기(煙氣)를 올려 멀리 또 가까이에 알린다고 한다. 이렇게 철옹성으로 알려진 만리장성이다.
2. 흉노(匈奴)
그림
한나라의 무제에 의하여 중국에 복속된 흉노는 한나라 성립이전에도 끊임없이 중국을 위협하는 대표적인 민족이었다. 흉노의 위협은 진시황제에게 기원전 215년에 몽염장군으로 하여금 흉노정벌과 만리장성을 구축하게 하였다. 진나라가 중국대륙을 통일한 시기에 흉노국도 기원전 209년경에 성립하였다. 중국이 최고통치자를 황제라고 부르는 명칭과 같이 흉노도 자신들의 최고통치자를 선우(禪于)라고 하였다. 선우의 의미는 "통치권이 하늘로 부터 내려왔다"는 뜻으로 유목군주인 선우는 유목세계의 천명사상에 근거해서 강력한 리더쉽을 발휘할 수 있다. 이러한 유목민들의 국가인 흉노는 유목할 때의 형태의 체제를 국가의 관직 및 군대조직에 채용을 하였다. 관직의 조직은 이십사장(二十四長)제라고 하여 24등급으로 나뉘어 졌고 등급은 선우가 총괄하는 중부(中部)와 그의 자제나 일족이 관장하는 좌우로 구분되었으며, 선우아래에 관직을 이원화하여 좌각(左角)과 우각(右角)이 존재하였다. 관직의 구성에서 좌의 관직이 우의 관직보다 우선이었다. 따라서 선우의 태자는 언제나 좌현왕에 임명되어 선우를 계승하였다. 24개의 등급으로 된 관직아래에는 직급에 따라 수만명에서 수천명에 이르는 기병을 두고 있었다. 당시의 이러한 조직의 힘에서 나오는 유연성과 기동력은 농경국가인 중국을 압도하기에 충분하였다. 흉노국의 1대 선우인 두만(頭曼:기원전 209년 사망)은 흉노국을 성립하고 제2대 선우인 모돈(冒頓:기원전 209-174년)은 재위기간동안 몽골리아를 중심으로 대제국을 형성하였다. 모돈선우는 막강한 힘을 앞세워 동으로는 동호(東胡), 서로는 월지(月氏)와 오손(烏孫), 북으로는 혼유(渾庾), 굴사(屈射), 정령(丁零), 격곤(隔昆)과 신리(薪犁)「이 지역들은 지금의 키르키스탄 일대임)」를 복속시키고 남으로는 중국으로부터 오로도스지역을 회복하였다. 모돈선우에 의한 국토확장은 동으로는 한반도의 북부, 북으로는 바이칼호, 서로는 아랄해, 남으로는 중국의 위수(渭水:지금의 서안)와 티벳고원까지 미치었다.
◀한과 흉노의 위치도
모돈선우 이후 제3대 노상선우 (老上禪于:기원전 174-기원전160년), 제4대 군신선우 (軍臣禪于:기원전160-기원전 126년) 재위기에는 전성기를 맞아 한나라를 빈번히 침공하였으며 노상선우 때에는 서쪽으로는 이리강(伊犁江:지금의 신강위구르자치구 서북지역)유역까지 진출하여 대월지(對月氏)를 다시 평정하고 남으로는 한의 수도인 장안을 위협하였다. 또한 흉노는 그 세력권을 서역(西域)으로 확장시키면서 타림분지를 중심으로 이 지역의 오아시스 국가를 복속시켰다.
◀서흉노가 위치했던 이리강 유역
진을 멸망시키고 (기원전 206년) 건국된 한나라는 초나라와 전쟁으로 국내정세가 불안하였고 경제사정도 안정되지 않아 대외정책에는 관심을 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국내여건을 무시한 채 한고조(漢高祖:기원전 206-195년)는 적극적인 흉노 정벌에 나섰지만 10여만의 대군을 상실하고 한고조도 포로로 잡히는 수모를 당한 끝에 기원전 198년에 흉노와의 화친정책을 맺게 되었다. 주요내용은 흉노의 선우에게 공주를 출가시킬 것, 일년에 몇번씩 비단과 술, 음식을 조공할 것, 한과 흉노는 대등한 형제국이며, 이러한 약속을 지키면 한나라를 침공하지 않는다는 한의 불평등 화친조약이었다. 그러나 흉노의 세력이 강성해지면서 매년 조공액을 인하하고 한문제(漢文帝:기원전 179-기원전157) 때에는 흉노와 변경무역을 위한 교역장소인 관시(關市)가 설치되었다. 이와 같이 융성하였던 흉노국은 한무제의 끊임없는 흉노정벌정책에 의한 원친근공(遠親近攻)의 전략과 장건, 위청, 곽거병을 앞세운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며 흉노를 궤멸시켜 나갔다. 한무제의 흉노정벌과 실크로드 교역을 차지하기 위한 한나라와의 전쟁에서 흉노는 서역지배권을 빼앗김으로 실크로드 무역을 통하여 얻었던 경제적 이익을 상실하므로 국력이 쇠퇴하게 되었다.
흉노는 국내적으로는 정권을 차지하기 위한 다툼이 심화되어 기원전 54년에 1차 분열을 맞이하여 외몽골리아를 근거로하는 질지선우 ( : 기원전56 - 기원전36년)가 이끄는 북흉노와 북흉노의 위협으로 부터 공격을 피하고자 중국과 인접한 내몽골리아에 근거를 둔 호한야선우 (呼韓耶禪于 : 기원전58 - 기원전 31년)의 남흉노로 분열되었다. 그러나 남흉노와 한나라간에 맺어진 화친협약(기원전 53년)으로 남쪽으로의 진출이 저지된 북흉노는 기원전 41년 투르키스탄지역의 추(Chu)강과 탈라스(Talas)강 유역으로 수도를 옮기며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였다. 북흉노의 서쪽으로의 이동으로 남흉노의 호한야선우는 기원전 43년에 북몽골리아를 회복할 수 있었다. 이러한 결과로 흉노는 투르키스탄을 중심으로 하는 질지선우의 서흉노와 몽골리아를 중심으로 하는 호한야선우의 동흉노로 양분되었다. 투르키스탄 지역으로 이동한 동흉노의 질지선우는 강거, 오손, 대월지 등 이 지역의 국가를 정복하고 투르키스탄 전역에 투르크계 인종의 뿌리를 내리는 중요한 발판을 마련하였다. 동흉노의 투르키스탄 지역의 지배는 한나라의 실크로드를 통한 교역의 이득에 대한 상실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로인하여 한나라와 서흉노는 연합하여 기원전 36년 감연수(甘延壽)와 진탕(陳湯)의 한과 동흉노의 연합군에게 추강과 탈라스강에서, 서흉노 군대는 대패하므로 인하여 서흉노는 멸망하게 되었다. 서흉노의 멸망은 흉노족의 이동을 촉진시켜 투르키스탄 전역과 카자흐스탄을 경유하여 카스피해와 볼가강 유역으로 이동하여 거주하다 그 후 400년 후 유럽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흉노족의 이동은 세계사의 중대한 사건으로 기록되는 게르만족의 대이동을 유발시켰다.
서흉노의 멸망과 한나라 왕망의 집권으로 인한 신(新)의 건국으로 한이 내전에 휩싸였고, 동흉노는 다시 여선우(輿禪于:A.D.18-46)때 흉노제국의 제1의 전성기였던 모돈선우와 한고조의 관계에 버금가는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후한(A.D.25-200년)의 광무제(光武帝) 때에는 여선우와 후한과의 관계에서 우위에 있었다. 그러나 여선우 이외에 호한야선우의 왕자 15명에 의해 15개지역으로 분할통치되던 흉노는 선우위계승권을 둘러싼 다툼으로 제2차 분열을 맞게되었다. 그 결과 A.D.48년에 포노선우(蒲奴禪于:46-?)의 북흉노와 후한의 영향권 아래에 있던 호한야선우(A.D.48-46)의 남흉노는 다시 양분되었다. 그 후 북흉노와 후한과 실크로드 교역의 이익을 확보하기 위한 싸움은 계속되었으나 북흉노는 신흥유목 세력인 선비(鮮卑)의 공격(A.D.87년)과 후한의 화제(和帝:A.D.88-105년) 때인 A.D.91년에 두헌(竇憲)이 이끄는 후한과 남흉노의 연합군에 의해 멸망하게 되었다. 북흉노가 멸망한 후 후한에 예속된 끝에 남흉노의 마지막 선우인 호주천(呼廚泉:195-216)이 폐위됨으로써 A.D.216년에 멸망하였다.
3. 장건
중국 전한(前漢)때의 여행가. 중국 사상 최초로 서역교통를 개척한 사람.
무제(武帝)의 명을 받고 흉노를 협공하기 위해 일리강(江) 유역에 있던 대월지(大月氏)와 동맹하고자 BC 139년경 장안을 출발하였다. 도중에 흉노에게 붙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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