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조약 보고서

 1  강화도조약 보고서-1
 2  강화도조약 보고서-2
 3  강화도조약 보고서-3
 4  강화도조약 보고서-4
 5  강화도조약 보고서-5
 6  강화도조약 보고서-6
 7  강화도조약 보고서-7
 8  강화도조약 보고서-8
 9  강화도조약 보고서-9
 10  강화도조약 보고서-10
 11  강화도조약 보고서-11
 12  강화도조약 보고서-12
 13  강화도조약 보고서-13
 14  강화도조약 보고서-14
 15  강화도조약 보고서-15
 16  강화도조약 보고서-16
 17  강화도조약 보고서-17
 18  강화도조약 보고서-18
 19  강화도조약 보고서-19
※ 미리보기 이미지는 최대 20페이지까지만 지원합니다.
  • 분야
  • 등록일
  • 페이지/형식
  • 구매가격
  • 적립금
자료 다운로드  네이버 로그인
소개글
강화도조약 보고서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report
―――――
“강화도 조약에 대해.....”
먼저 저희는 교과서에서도 배울수 있는 따분한 일본의 오리지널 역사에 대한 것 보다는 “강화도 조약”이라는 한 부분의 역사에 대해서 깊이있게 되짚어 보고자 합니다. 교수님 이하 학우들의 많은 양해 바랍니다.
‘열강의 제국주의’
19세기 중엽부터 20세기초까지의 조선사회는 커다란 역사적 변동기였다. 이 시기에 조선은 중국중심의 세계질서로부터 이탈하여 근대적 국제질서로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서구열강과 일본의 제국주의 침략에 대처하고 국내 문제를 해결하면서 근대민족국가를 수립하고자 노력하였다. 이 당시 조선의 외교는 중국과 일본과의 전통적인 사대교린 관계를 유지하였으며 그 밖의 서양은 야만으로 치부하여 철저히 배척하였다. 그러나 산업혁명을 거친 서구제국주의 열강들은 동아시아의 기존질서를 크게 동요시키면서 시장개척과 값싼 원료공급지의 확보를 위해 동아시아에 침입하였다.
서구열강의 근대적 무기 앞에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각국은 무력하였고, 일본 역시 미국에 의해 문호를 개방하였다. 이때까지 독자적인 문화권과 생활권을 유지하고 있던 조선사회에도 서양세력이 침입하였다. 이들은 주로 한반도 해안에 대한 탐사와 측량에 나섰으며, 때로는 통상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조선은 이러한 서양의 도전에 대해 천주교에 대한 경계나 박해를 강화하였다. 특히 이양선의 잦은 출몰과 북경의 함락소식은 조선사회를 뿌리 째 흔들어 놓을 정도로 충격적인 것이었다. 이에 조선왕조는 서양의 통상 요구를 차단하면서 전통적인 체제를 고수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서구열강과 일본의 조선에 대한 팽창주의정책은 가속화되었으며 조선은 점차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이러한 외부로부터의 도전은 조선왕조의 성패가 달려 있음은 물론 자칫하면 식민지로 전락할 수도 있는 매우 심각한 문제였다.
‘당시 조선의 상황’
조선 제26대 왕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은 1820년 영조의 현손 남연군구(南延君球)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12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17세 때에는 아버지를 여의고 사고무친(四顧無親)의 낙방 왕손으로 불우한 청년기를 보내었다. 21세가 된 1841년 (헌종 7년)흥선정(興宣正)이 되었고, 1843년에 흥선군(興宣君)에 봉해졌다.
고종이 왕위에 오를 당시 조정은 안동 김씨의 손아귀에 있었다. 그들은 순조 이후 반세기 이상을 계속해서 권력을 독점하고 있는 상태였는데 헌종의 어머니이자 효명세자(익종)의 부인인 신정왕후 조씨는 이같은 권력 구도를 깨트 리기 위해 남연군의 아들 이하응과 결탁하여 그의 아들 명복을 왕위에 앉히게 된다. 둘째 아들 명복을 즉위시키기 위한 이하응의 계략은 치밀했다. 안동 김씨 세력의 경계에서 벗어나기 위해 건달들 과 어울려 지내는가 하면 안동 김씨 가문을 찾아다니며 구걸을 하기도 했다. 이같은 호신책 덕분으로 목숨을 부지 한 그는 철종의 죽음이 임박하자 익종비 조대비와 연줄을 맺어 자신의 둘째 아들 명복을 왕위에 앉히려 한다. 조대 비 역시 그와 마찬가지로 안동 김씨의 세도에 짓눌려 지내던 처지였기에 이하응과 뜻을 같이하게 된다. 1863년 12월 철종이 죽자 조대비는 이하응의 둘째 아들 명복을 양자로 삼아 익종의 뒤를 잇게 하고 자신이 수렴청 정을 하였다. 그리고 이하응을 흥선대원군으로 봉하고 섭정의 대권을 그에게 위임시켰다. 이로써 고종을 대신한 흥 선대원군은 향후 10년 동안 권력을 쥐고 자신의 의지대로 정사를 운영하게 된다.
조선시대에 외국과의 통상을 제한하여 교류관계를 맺지 않았던 정책으로 우리 나라는 삼국시대나 고려시대에는 외국과 활발한 교역을 맺었으나, 조선시대에는 쇄국정책을 고수하여 중국과 일본 두 나라만의 사대교린 정책을 시행했다.
조선말기에 이르러 천주교가 유입되고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이 본격적으로 문호개방을 요구해왔다. 천주교 선교사들의 선교수단으로 교육(敎育),학문(學文), 예술(藝術) 방면까지 광범위하게 포교활동을 전개하였기 때문에 군사적 유입은 아니었으나 기존의 주자학(朱子學)의 신념체계를 흔들어 놓는 큰 요인이 되었다.
이러한 사상적 침투는 주자학적 사상에 젖어 있는 조선 왕조의 정책 결정을 맞고 있던 사람들로 하여금 위기감을 느끼게 하였다. 또한 19세기에 들어와서 서구 열강들은 제국주의로 약소국가의 영토를 침범하고 아시아의 제국(諸國)에서도 침략정책(侵略政策)을 감행하였다. 이러한 서구 세력의 군사, 종교, 경제적 침투는 조선인들에게 자기 보존에 대한 위기의식을 고조시켰다. 이 상황에서 조선 왕조의 대응은 서양제국에게 문호를 개방하고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신 문물을 받아들이느냐 아니면 철저한 쇄국정책으로 외세의 침투를 적극 저지하느냐 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었다. 이에 대원군은 쇄국정책을 선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