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명에 확신을 넣어준 남사당의 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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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숙명에 확신을 넣어준 남사당의 하늘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R e p o r t
‘숙명에 확신을 넣어준-’
남사당의 하늘
2008년은 한국의 신연극이 시작된 지 100주년을 맞이하는 뜻 깊은 해이다. 그 뜻을 기념
하고자 여러 공연들이 준비 되었는데, ‘남사당의 하늘’이 그 첫 번째 주자이다. 남사당의 하늘은 1994년 초연 한 후 14년 만에 올려 지게 되는 것인데, 주연배우들은 초연당시의 배우들이 다시 모였다. 한국의 신연극 100주년을 기리는 축제와 같은 기간에, 왜 ‘남사당의 하늘’ 이라는 공연이 첫 번째로 무대에 올라가게 되었을까? 어떤 공연이기에? 라는 생각을 품은 체 극장을 찾았다.
무대
무대는 특별한 장치가 없는 빈 무대에 뒤쪽은 경사가 있었고 그 경사 가운데는 턱과 같은 작은 돌출된 장치가 있었다. 곧이어 60여명의 배우들이 등장해 기나긴 여정을 떠나는 것으로 극이 시작했다. 남사당패의 많은 사람들이 무대 뒤의 경사로를 오르며 무대를 크게 한 바퀴 도는데 아무 것도 없었던 완전히 비었던 무대가 가득 차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꽃가루 비슷한 것이 뿌려져 있던 가운데 원형무대가 돌아가면서 배우들은 제자리걸음을 걷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산을 넘고 물을 건너는, 힘들지만 행복한 남사당패의 여정과 같이 느껴졌다. 극의 시작이 웅장하고 뭉클했다. 하지만 극단 [미추]의 대표이자 ‘남사당의 하늘’의 연출인 손진책선생님의 글을 보니, 1994년 초연에 비해 극장의 규모가 작아 웅장함을 표현하지 못한 것 같아 아쉽다는 말이 있었다. 이번 공연에서도 남사당 패의 업과도 같은 여정이 웅장하게 잘 표현된 것 같았는데, 엄청난 규모의 원형무대가 돌아가면서 실제의 여정을 보여주었다는 초연공연은 어땠을까라는 아쉬움을 품게 되었다. 과연 초연당시 5개 부문에서 상을 휩쓸만했다라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그 외에 무대에 장치는 와이어가 있었다. 요즘 무용공연이나 대극장 공연에서 와이어는 더 이상 특별한 것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공연을 보기 전에 가졌던 ‘남사당의 하늘’의 이미지와 와이어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 특별하게 느껴졌다. 바우덕이가 멋진 공연을 선보일 초- 중반에 한번, 그리고 후반부에 바우덕이가 줄에서 떨어질 때 한번 사용 되었다. 그 의미를 나름대로 해석해 보자면, 원형무대가 보여주지 못했던 웅장함을 와이어로 보태려고 한 것 같았다. 어찌보면 요즘 세대와 남사당패는 이질감을 주기 쉽고 자칫 지루해질 수도 있는데 그것을 무대의 장관으로 대신해주려고 한 것 같았다. 나름대로 이해한 것으로 의미는 이해가 되었으나 그 효과는 약했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김성녀씨가 와이어와 친숙하지 않아서 줄을 탄다는 느낌 보다는 와이어에 매달려있다는 인상이 너무 강했기 때문이다. 김성녀 씨와 이 공연이 주는 여러 가지 의미로는 굉장히 뿌듯하게 다가왔으나, 객관적인 관객의 입장으로 돌아본다면 극에 집중을 깨는 부분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느낌은 극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는 바우덕이가 줄에서 떨어져 죽는 부분에서도 계속 되었다. 모든 배우들이 슬로우 모션으로 연기를 했고 김성녀씨 또한 줄에서 떨어지는 연기를 그렇게 했으나, 볼 때의 느낌은 떨어진다기 보다는 초능력과 같은 것으로 천천히, 마치 선녀처럼 땅에 착지 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멋진 착지를 한 후에 떨어져서 죽었다는 다른 배우들의 연기가 어울리지 않아 절정부분에서도 집중이 흐트려졌었다. 이것이 연극적인 약속이라고는 할 수 있는 부분이지만 순간 생소화 효과가 생겨 당황되었다. 하지만 14년전 배우들과 함께 다시 공연을 준비했고 젊은 배우가 아닌 김성녀씨가 와이어를 시도했다는 측면에 더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는 게 개인적인 입장이다.
그리고 눈에 띄는 무대로는 오케스트라 피트에 정말 그 시대에나 볼 수 있는 나무로 된 다리가 무대 위로 등장을 했다는 것이었다. 사실감 있는 나무다리로 지루할 수 있는 빈 무대를 채워 주었고 공간 활용도 용이했으며 다리로 활용된 오케스트라피트 앞까지 무대로 사용하다 보니 대극장에서 연극으로 관객과 호흡하기 힘들다는 단점을 극복했던 것 같아 인상 깊었던 무대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인상 깊었던 것은 주막 세트였다. 거의 가옥세트는 없이 나무다리나 조명으로 구역을 나누었는데 갈 곳 없는 남사당패의 모습과 초라한 작은 오두막 느낌의 세트가 잘 어우러진 것 같아 인상 깊었다. 특히, 그 작은 공간에 수십명의 배우들이 모여앉아 우울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가면극 놀이를 하는 장면이 마치 지금 배우의 꿈을 가진 나와 다른 친구들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굉장히 공감이 되었던 장면이었다.
조명
이번 공연에서 조명과 무대는 조화가 잘 이루어 졌던 것 같다. 무대가 빈 무대이니 만큼 세트를 보여주어야 하는 조명의 역할보다는 공간을 만들어 주어야 했는데, 빈 무대와 조명의 공간만들기가 조화를 잘 이룬 것 같았다. 예를 들면 원형무대까지의 무대 공간과 그 뒤에 경사진 공간 사이에 샤막을 내려서 바로 뒤에 보이는 경사진 곳에 서 있는 게 아니라 좀 더 먼 곳에 서 있는것과 같은, 입체적인 공간이 연극적으로 만들어질 수 있게 했다. 그리고 바우덕이의 내면 갈등을 보여주는 장면에서는 위와 같이 가운데 샤막을 내리고 그 뒤편 상-하수 끝쪽에 두명의 배우가 큰 탁자위에 올라서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연기하는 부분이 있었다. 어두컴컴한 무대 샤막 뒤편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니, 마치 사람이 공중에 떠있는 것 같이 보였고 실제 배우의 크기보다 더 커 보였으며 꿈속의 공간과 같은 느낌을 들게해서 바우덕이의 내면갈등을 잘 표현해준 것 같아 좋았다.
의상
의상은 채도는 전반적으로 낮아 부드럽고 따뜻한 느낌의 한복을 주로 입었다. 그에 반대되는 양반 지주는 채도가 높고 반짝이고 화려한 의상을 입어 남사당패와 대비를 이루었다. 무대와 조명에 비해서 인상 깊은 의상이 많지는 않으나 한 가지 깊은 인상을 주는 의상이 있었다. 그것은 남사당패를 이끌어가선 꼭두쇠 어른이 입던 옷을 바이덕이에게 물려주는 옷이었다. 그 장면이 너무나 감동적여서 그 의상을 더 빛나게 해주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꼭두쇠 어른이 물려주는, 평소 남사당패의 옷보다는 약간 화려했던 그 옷을 바우덕이가 입자, 꼭두쇠 어른이 입고 있을 때 보다 몇 배로 빛이 났다. 지주가 입었던 의상보다 화려하지도 않았고 그 전 꼭두쇠 어른이 입었을 때는 크게 눈에 띄지도 않았던 옷이 갑자기 진가를 발휘하는 느낌을 받았고 그래서 감동이 두 배로 전해지는 것 같았다.
나는 이 ‘남사당의 하늘’을 보면서 많이 웃었고 웅장함에 놀라기도 했으며 쌓였는지도 몰랐던 설움에 눈물을 흘리며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우리는 역마살이 낀체로 태어나 하늘을 바라보며 살고 있다는 대사를 들었을 때는 광대는 무엇인가? 라는 생각을 하게 했다. 일정한 보수나 정해진 수입도 없이 오직 잠자리와 끼니만을 때울 정도만을 제공 받으며 전국 각지를 유랑하며 놀이판을 벌이는 사람들이 남사당패이다. 저들은 무엇을 위해 저리도 열심히 살까? 역마살이 끼어 하늘로 돌아가기 위해 산다고는 하지만 그것보다는 그렇게 밖에 풀 수 없는 타고난 끼와 재능을 풀고 사는 것이 힘든 길이지만 행복하고 그 길이 아니면 살수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했다. 내가 지금 공부하고 있는 배우의 길 또한 그러한 것 같다. 요즘에는 연예인으로 주목을 받아 화려하고 멋진 사람들이 될 수 있는 직업으로 인식이 되고 있지만 배우의 배가 사람인의 아닐 비를 합친, 사람이 아닌 사람인 것처럼 배우의 길은 남사당패와 같이 힘든 길이라는 생각을 하게 했다. 또, 바우덕이가 결혼을 한 몸임에도 불구하고 양반의 하룻밤 상대가 되는 것을 마다하지 않던 부분이 있었다. 이때 바우덕이는 하룻밤 상대가 되는 것에 전혀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았고 오히려 당당했었다. 도덕적인 잣대로 재자면 말이 안되는 문제이지만 도덕이전에 생존을 해야 하는 사람들이었고 그 생존 또한 단순한 생존이 목적이 아닌 그들이 사명처럼 가지고 있는 역할의 완수를 위한 수단이었던 것이다. 양반의 이런 제의가 들어왔을때 바우덕이가 처음에는 여자로써 아내로써 엄마로써 힘들어 했지만 결국 내린 선택과 그 명분이 사명을 가진 사람에게서 나오는 자부심이 느껴져 보는 관객을 슬프게 했다. 저럴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슬픈 것이 아니라, 나 또한 바우덕이와 같은 광대, 배우의 인생을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으로 느끼는 동질감에서 오는 슬픔이었다. ‘남사당의 하늘’의 이런 장면들로 인해 나는 울기도 했으며 웃기도 했으며 생각도 하게 만들어 주었다.
‘남사당의 하늘’은 작품을 쓴 윤대성 극작가의 말처럼 배우는 광대는 누구인가? 예술은 무엇이고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것 같다. 하지만 요즘 대학로는 다른 나라의 공연인 뮤지컬이 대극장, 소극장, 전용관 할 것 없이 발전하는 분위기속에서 연극의 현주소는 매니아만을 기다리고 있은 것 같다. 한국연극 100년을 맞아 모든 연극의 선인들에게 오늘의 공연을 바치며, 반성과 각오를 다지고자 한다는 손진책 연출의 말처럼 이 공연은 한국연극이 부흥하기를 바라는 각오와 지금까지 그러지 못했다는 반성을 담고 있는 것 같다. 100주년 공연 연극의 대중화를 위해 대극장 공연을 전석 만원으로 낮추고 작품 또한 예술가의 사회적 역할을 묻는 작품을 선택한 것 같다.
한국 연극 100주년을 기리는 작품으로 왜 ‘남사당의 하늘’을 선택했는지 이제는 알것 같다. 평생 배우로 살겠다는 꿈을 가진 나에게 위로도 해주었고 숙명이라고 생각했던 내 길에 확신을 불어준 것 같아 굉장히 뜻 깊은 공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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