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 독립운동가 겸 정치가 김규식金奎植

 1  항일 독립운동가 겸 정치가 김규식金奎植-1
 2  항일 독립운동가 겸 정치가 김규식金奎植-2
 3  항일 독립운동가 겸 정치가 김규식金奎植-3
※ 미리보기 이미지는 최대 20페이지까지만 지원합니다.
  • 분야
  • 등록일
  • 페이지/형식
  • 구매가격
  • 적립금
자료 다운로드  네이버 로그인
소개글
항일 독립운동가 겸 정치가 김규식金奎植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항일독립운동가정치가 김규식(金奎植)1881~1950.
항일독립운동가정치가. 본관은 청풍(淸風). 교명(敎名)은 요한(Johann), 아호는 우사(尤史). 동래출신.
중방파(仲房派)23세손으로서 1881년 지성(智性)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우리나라에 파견된 청나라의 위안스카이(袁世凱)가 내정간섭을 단행하자, 동래부사의 막료로 있던 그의 아버지 지성은 일본과의 관계설정에 관한 상소문을 올렸는데, 이것이 화근이 되어 귀양갔다.
게다가 1887년에는 어머니마저 사망하여 6세에 고아가 되었는데, 마침 우리나라에 와 있던 미국 북장로파의 선교사 언더우드(Underwood, H. G.)의 보살핌으로 성장하였으며, 그때 요한이라는 교명을 받았다.
1906년에 조순환(趙淳煥)의 딸 은수(恩受)와 결혼하여 아들 둘을 얻었으나, 차남 진동(鎭東)만 남았다. 1917년에 첫부인과 사별하고, 1919년에 김순애(金淳愛)와 재혼하여 장녀 우애(尤愛)을 얻었다. 1897년부터 1903년까지 미국 버지니아주의 로노크대학교(Roanoke Univer-sity)에서 공부하였으며, 이듬해 프린스턴대학원(Prinston Academy)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귀국하여, 1904년부터 1913년까지 언더우드목사의 비서, 와이엠시에이학교(YMCA學校) 교사, 경신학교(儆新學校) 학감으로 있었고, 1910년부터 1912년까지는 연희전문학교 강사를 역임하였다.
그의 교회활동으로는 1910년에 새문안교회의 헌당식을 보게 되었고 장로가 되었으며, 1911년에는 경기충청장로회 서기로 뽑혔고, 1912년에는 전국주일학교연합회 집행위원회 부위원장직을 맡기도 하였다. 1911년 일본의 교회탄압이 시작되자, 1913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화북(華北)과 몽고지방에서 상업에 종사하기도 하였으며, 1916년에 앤더슨마이어회사(Anderson & Meyer Company)에 입사하여 몽고 울란바토르 지점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정치적 활동으로는 1918년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약소민족대회 및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 한국대표로 참석하여 1945년 11월 고국에 돌아올 때까지의 해외활동을 들 수 있다.
1919년 3월 파리에 도착한 그는 조선혁명당의 이름으로 항일전선을 구축하고, 파리에 조선공보국(朝鮮公報局)을 설치하여 그해 4월 10일 공보국 회보를 발간하는 한편, 젊은층을 흡수하여 신한청년당을 조직, 그 대표가 되었다.
이들은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표 명의로 된 탄원서를 강화회의에 제출하고 〈한국민족의 주장〉〈한국의 독립과 평화〉 등의 민족선언서를 작성, 배포하였다.
이어 대한민국임시정부 구미위원부(歐美委員部)위원장, 학무총장 등에 선임되었으며, 1921년 동방피압박민족대회에 참석하여 상설기구를 창설하고, 1927년에 그 회장직을 맡으면서 기관지 《동방민족 東方民族》을 창간하였다. 1935년 민족혁명당을 창당하여 그 주석이 되었고, 1942년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지냈다. 815광복이 되자 11월 23일 환국, 그해 12월 27일 모스크바삼상회의의 결정문을 국민에게 발표하고 즉각 반탁운동을 전개하였다.
1946년 2월 민주의원 부의장, 3월 미소공동위원회 한국대표, 5월에 좌우합작 준비작업을 추진하고, 그해 6월부터 7월까지 미군정 좌우합작위원회 예비회담에 참가하였고, 12월 입법의원 의장, 1947년 10월 민족자주연맹 의장이 되었다.
오늘 본 자료
더보기
  • 오늘 본 자료가 없습니다.
해당 정보 및 게시물의 저작권과 기타 법적 책임은 자료 등록자에게 있습니다. 위 정보 및 게시물 내용의 불법적 이용,무단 전재·배포는 금지되어 있습니다. 저작권침해, 명예훼손 등 분쟁요소 발견 시 고객센터에 신고해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