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당 합당과 남로당 의결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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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당 합당과 남로당의 결성
해방 후 조직된 좌익정당으로는 조선공산당, 조선인민당, 남조선신민당 등 3개 정당을 들 수 있다. 이들은 같은 좌익정당이면서도 각기 전통과 이념, 혁명의 추진 세력 설정 등에서 독자성을 띠고 그 차이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당면 투쟁과제로서 3상결정의 지지와 미소 공동위원회를 통한 임시정부수립, 그리고 일제 잔재의 청산과 토지개혁 실시 등 중요한 정책과 노선에는 공동보조를 취했다. 그리고 그들은 민주주의민족전선이라는 좌익 통일전선체를 조직하고, 3상결정을 위한 공동투쟁을 전개했다.
그러나 1946년 5월 미소 공동위원회가 무기 휴회로 중단됨으로써, 그에 기대를 걸고 지지해온 좌익정당에게는 큰 실망을 안겨다주었으며, 이와는 반대로 우익진영에는 세력을 확대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심지어 이승만의 정읍발언까지 나와 단독정부를 수립할 수밖에 없다는 소리까지 나오게 되었다.
또한 좌익에 대한 탄압이 이 무렵부터 본격화되기도 하였고, 미군정에서는 여운형, 김규식 등 중간파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좌우합작운동을 전개시켜 중도적 좌파 세력들을 규합하려고 함에 따라, 이미 구축해놓은 좌익의 통일전선을 비롯한 모든 조직세력이 분열될 위험성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미소공동위원회의 재개와 3상결정의 실천 투쟁을 효율적으로 전개해 나가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당의 조직강화와 좌익진영의 결속이 요구되었고, 이에 적절하게 대처해나가기 위해서 노동계급의 대표를 표방하는 ‘공산당’보다는 노동자, 농민, 도시소시민, 근로인텔리 등 근로대중의 성격전환이 필요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민민주주의혁명과업을 수행하는 지도핵심세력으로서 대중정당을 표방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한편 북한의 정치사정 역시 3당 합당을 추진하게 하는 하나의 요인이 되었다. 1946년 7월 29일 개최된 북조선공산당과 조선신민당의 중앙위원회 확대연석회의에서는 양당이 합당하여 북조선노동당이라는 대중정당으로 개편하기로 결정을 보았는데, 이것은 남한의 좌익정당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1946년 8월 3일, 인민당에서는 당본부 사무실에서 중앙집행위원회를 개최하고 최초로 합당을 제의하기로 결정했다. 중앙집행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인민당에서는 합당 교섭위원들을 선출하였고, 그들로 하여금 합당 제안문을 작성하여 조선공산당과 신민당에 보내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민주주의적 건설을 현단계의 과업으로 하고 있는 이상 그 세력을 분산시키고 때로는 무용의 마찰을 가져올 수 있는 정당의 별립은 무의미하기 때문에 한 개의 거대한 정당으로 합동되어야 한다는’ 요지의 이 제안문은 여운형의 명의로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박헌영과 신민당 위원장 백남운에게 당일 발송되었다.
이 제안을 접수한 조선공산당에서는 다음날 중앙위원회를 열고 이 문제에 대해서 토의하여 이 제안에 대해 전적인 찬성을 결의하는 동시에 인민당 중앙위원회와 합동교섭을 즉시 개시하기로 결정하였다. 신민당측에서도 중앙위원회를 열고 합당제의를 토의한 뒤 원칙적으로 3당 합동제의를 찬성한다는 결정을 보았다. 그리고 그들은 각기 합당에 찬성한다는 회답을 인민당으로 보냈다. 이처럼 좌익계 3개 정당이 합당하여 단일한 대중정당으로 된다는 것은 각 당의 수령과 중앙위원 대부분의 지지를 얻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공산당의 경우에 박헌영 중심의 지도부에 반발을 취해온 ‘반간부파’들은 3당합당과 같이 중요한 문제는 당중앙의 몇몇으로서가 아니라 당대회를 개최하고 당원의 의사에 따라 민주적으로 결정해야 하기 때문에 당대회 소집을 요구하면서 반기를 들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열리지 못했던 당대회를 개최하고 합당문제를 토의한다는 명분으로 박헌영 지도체제를 개편시키려 했던 것이다. 이에 강진 등 6인은『청년해방일보』의 호외를 통해 박헌영 일파에게 정면으로 도전하고 나왔다. 박헌영 일파는 즉시 그들을 반당적 이적행위자들로 규정하고 제명 등의 처분을 내렸다. 그러나 강진 등 6인은 당지도부의 파벌분자들의 독선적 경향과 일파전제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것 등의 이유로 당대회 소집을 제창하였다. 조선공산당은 박헌영 중심의 추진파와 강진 등의 대회파로 나누어져 파벌 투쟁을 벌이게 되었다.
이러한 당내의 분열은 인민당과 신민당에서도 마찬가지로 일어났다. 본래 인민당 지도부는 좌우온건파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이들은 합당문제를 계기로 크게 대립하게 되었다. 좌파는 ‘무조건’ 합당을, 우파는 여운형의 합당노선을 들고 나왔는데, 주로 합당의 방법문제에 있어서 서로 대립했다. 결국 내부의 합의를 보지 못하고 48 대 31로 좌파가 약간 우세한 방향으로 당론이 기울어졌는데, 이때부터 48파와 31파라는 이름으로 좌우파가 나누어지게 된다. 신민당의 경우에는 위원장인 백남운이 3당합동을 원칙적으로는 동의하였으나 합동방법에 대해서는 매우 신중한 태도를 취했었는데, 중진급인 정노식 등은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방향을 들고 나왔다. 이로 인해 백남운을 지지하는 반간부파와 정노식 등을 지지하는 중앙파로 나누어져 대립하게 되었다.
이처럼 좌익정당들은 ‘조선공산당의 추진파와 대회파, 인민당의 48파와 31파, 신민당의 중앙파와 간부파’ 이렇게 3당 6개파로 갈라지게 되었다.
참고문헌
※ 참고문헌
『해방전후사의 이해3』, 박현채김남식 외, 한길사
『고쳐 쓴 한국현대사』, 강만길, 창작과비평사
『한국현대사1』, 한국현대사연구회 현대사연구반, 풀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