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경궁昌慶宮조사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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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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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창경궁(昌慶宮)
▶창경궁(昌慶宮)
창경궁(昌慶宮)은 성종 14년(1483) 조선의 이궁(離宮)으로 창건되었다. 원래 이곳에는 세종대왕이 상왕인 태종을 모시기 위하여 1418년에 건립한 수강궁(壽康宮)이 있었으나 성종은 세조의 비 정희왕후와 생모가 되는 소혜왕후와 양모인 예종의 비 안순왕후를 편하게 모시려고 경복궁이나 창덕궁이 있는데도 수강궁을 대폭 수리하여 창경궁을 만든 것이다. 수강궁(壽康宮)은 상왕 태종이 여전히 군사력을 장악한 채 아들의 왕권을 튼튼하게 보강하기 위하여 창덕궁 옆에 지은 궁이다. 수강궁이 창덕궁 곁에서 후견인 노릇을 하던 상왕을 위해서 지어졌던 데 반하여, 창경궁은 돌아가신 선왕의 여러 왕비들이 왕궁 안에서 왕과 함께 거처하는 것이 불편하여 왕궁 밖의 장소에서 살기를 희망하였기 때문에 새롭게 지은 것이다.
▶창건배경
13살의 어린 나이로 즉위한 성종에게 대비들의 막후 조언이 큰 힘을 발휘하였겠지만, 어렵게 왕위를 계승한 성종이 통치자로서의 권한을 확보하는 데 방해가 될 것을 염려한 웃어른들이 스스로 지혜를 모아 상왕과 그 비가 살던 수강궁에 나가 사는 방법을 모색하였다. 성종 10년(1479)에 처음으로 대왕대비 정희왕후가 발의한 이 의견은 그 뒤에 세 대비가 경복궁이나 수강궁에 거처하는 방식으로 실행에 옮겨졌다.
그리하여 왕 13년(1482) 12월에 드디어 수강궁 수리를 결정하여 다음해인 14년 2월에 공사가 시작되었으나 대왕대비의 죽음으로 공사는 8월에 가서야 재개되었고 다음 해 1월에 대체적인 공사가 끝나고 9월에는 낙성되었다. 하지만 세부공사가 모두 끝나고 두 대비가 새로운 궁궐인 창경궁에 들어간 것은 왕 16년 5월 7일의 일이다. 한편 궁안의 전.당.각(殿堂閣)의 이름은 15년 2월에 서거정이 지었고, 「창경궁기」는 15년 3월에 김종직이 지었다.
창건 당시 창경궁의 모습을 알려줄 자료로는 서거정이 지었다는 건물 이름에 대한 기록이 있다. 즉 “전(殿)은 명정전.문정전.수녕전.환경전.경춘전.인양전.통명전이라 하고 당(堂)은 양화당.여휘당, 각(閣)은 사성각이라 했다.”는 데서 적어도 전이 7채, 당이 2채, 각이 1채였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15년 7월에 환취정이라는 정자가 더 지어졌다. 한편 16년 4월에는 왕이 내전에 들지 않고 숭문당에서 잠자리에 들었다고 한 것으로 보아 이때 숭문당이 외전(外殿) 구역에 지어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창경궁의 특징
창경궁은 처음 대비들을 위한 대비전으로 만들어져 왕의 이궁(離宮) 역할을 하였던 궁궐이다. 따라서 법궁의 역할을 주로 담당했던 경복궁과 창덕궁 등에 비해 그 규모가 작고 법식에 있어서 품격이 조금 낮은 면이 있지만, 상대적으로 생활기거 공간인 내전이 매우 발달되어 있다. 이는 창경궁의 가장 큰 특징이기도 하다.
또한 창경궁이 다른 궁궐과 다른 가장 큰 특징은 바로 궁궐의 배치이다. 다른 궁궐은 모두 그 좌향이 남향인데 반해서 창경궁은 동향을 하고 있다. 궁궐은 정전을 남향으로 하여 건립하고 남북 일직선상에 남으로부터 정문, 법전, 편전, 침전을 배치하는 것이 원칙인데 창경궁은 홍화문과 명정전 등 궁의 좌향이 동향이다. 그리고 편전인 문정전은 남향을 하여 서로 대치되는 좌향으로 지어졌다. 창경궁이 남향을 하기 어려웠던 이유는 동쪽에 물이 흐르고 남서북으로 가깝게 구릉으로 둘러져 있어 배산임수로서의 입지와 조건이 동향이 적합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렇듯 창경궁은 정해진 궁궐의 법식보다는 자연지세를 따라 배치하였던 것이다.
창경궁이 다른 궁궐과 대비되는 또 다른 차이점은 정전까지의 문이 3문이 아닌 2문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3문의 형식이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이 경복궁으로 광화문-흥례문-근정문이 근정전으로 이어지는 3문 형식이 그것이다. 하지만 창경궁의 경우 홍화문-명정문이 명정전으로 이어져 문의 영역 하나가 생략된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그 축도 약간 휘어져 있음을 볼 수 있다. 말하자면 창경궁은 정해진 제도와 법식을 따르기보다는, 주변 지세와 주된 기능과 용도에 따라 독창적으로 배치되고 지어졌음을 알 수 있다.
▶창경궁과 인물들
창경궁과 인연이 있었던 인물로는 광해군과 정조, 사도세자, 장희빈 등일 것이다. 광해군은 창덕궁에서 단종이나 연산군이 쫓겨난 사실이 꺼림직하기도 하고 국내 정세가 불안정하자 창경궁을 지어 거처하려 하였고, 효자 정조는 어머니 혜경궁 홍씨(혜빈)를 위해 자경전을 짓고 나중에는 창경궁으로 거처를 옮겨 자경전 아래 영춘헌에서 살다가 승하하였다. 그리고 사도사제가 뒤주 속에 갇혀 죽음을 당한 곳도, 숙종 때 인현왕후와 장희빈에 얽힌 사건이 있었던 곳도 다 창경궁에서 일어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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