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적답사보고서] 창덕궁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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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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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창덕궁은?
2. 조선왕조와 함께한 창덕궁
(1) 왕자의 난으로 정권을 잡은 태종
(2) 임진왜란을 견뎌낸 선조
(3) 반정과 호란 속에 고군분투한 인조
(4) 영조와 사도세자의 궁궐 플레이 ‘임오화변’
(5) 규장각을 통해 문예를 부흥시킨 정조
(6) 세도정치에 희생된 비운의 순조
(7) 세도정치와 싸운 대리청정인 효명세자 그리고 후원
(8) 외세에 눌린 고종과 비극의 시작
(9) 무너지는 조선과 왕궁의 수난
본문내용
1. 창덕궁은?


서울 종로구 와룡동(臥龍洞)에 있는 조선시대의 궁궐.

지정번호 : 사적 제122호
지정연월일 : 1963년 1월 18일
시대 : 조선
크기 : 43만 4877㎡
소재지 : 서울 종로구 와룡동 2-71

창덕궁은 조선왕조 제3대 태종 5년(1405) 경복궁의 이궁으로 지어진 궁궐이며 창건시 창덕궁의 정전인 인정전, 편전인 선정전, 침전인 희정당, 대조전 등 중요 전각이 완성되었다. 그 뒤 태종 12년(1412)에는 돈화문이 건립 되었고 세조 9년(1463)에는 약 6만2천평이던 후원을 넓혀 15만여평의 규모로 궁의 경역을 크게 확장하였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선조 40년(1607)에 중건하기 시작하여 광해군 5년(1613)에 공사가 끝났으나 다시 1623년의 인조반정때 인정전을 제외한 대부분의 전각이 소실되었다가 인조 25년(1647)에 복구되었다. 그 후에도 여러 번 화재가 있었으며, 1917년에 대조전 과 희정당 일곽이 소실되어 1920년에 경복궁의 교태전·강녕전 등 많은 건물을 철거하여 창덕궁으로 이건하였다.
창덕궁은 1610년 광해군때 정궁으로 사용한 후 부터 1868년 고종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까지 258년 동안 역대 제왕이 정사를 보살펴 온 법궁 이었다. 창덕궁 안에는 가장 오래된 궁궐 정문인 돈화문, 신하들의 하례식이나 외국사신의 접견장소로 쓰이던 인정전, 국가의 정사를 논하던 선정전 등의 치조공간이 있으며, 왕과 왕후 및 왕가 일족이 거처하는 희정당, 대조전 등의 침전공간 외에 연회, 산책, 학문을 할 수 있는 매우 넓은 공간을 후원으로 조성하였다.
정전 공간의 건축은 왕의 권위를 상징하여 높게 하였고, 침전건축은 정전보다 낮고 간결하며, 위락공간인 후원에는 자연지형을
참고문헌
1. 창덕궁과 창경궁 (2003) - 한영우 저
2. 창덕궁 홈페이지 (http://changdeok.ocp.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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