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간디 조만식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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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한국의 ‘간디’ 조만식 장로
(1883~1950)
1. 한국 현대사와 조만식
삼일운동을 겪은 후 우리나라 민족운동은 두 흐름으로 나뉘었다. 첫째는 독립선언을 한 만큼 우리를 강제로 지배하고 있는 일본을 축출하기 위한 적극적인 항일투쟁을 벌이는 것이다. 이들은 해외에 설립된 임시정부와 독립운동 단체와 연계해 항일 무장 투쟁을 벌였고 그만큼 피해도 컸다. 두 번째 흐름은 당장 이루어질 것 같지 않은 독립의 때를 위해 실력을 키워나자는 것이다.
이들은 삼일운동 이후 총독부가 표방한 ‘문화통치’ 체제 하에 민족계몽운동, 농촌운동, 절제운동 등 다양한 형태의 사회운동을 전개하면서 대중을 상대로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삼일운동 때 이미 비폭력 평화운동 노선을 표방한 기독교계 민족운동가들은 전자보다 후자 흐름을 택하여 1920-30년대 민족주의적 사회운동을 전개하였다. 기독교계에서 이런 흐름을 대표하는 인물이 고당(古堂) 조만식이었다.
평양에서 출생하여 숭실중학교에 다니며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된 조만식은 1908년 일본에 유학 메이지대학을 졸업하고 돌아와 이승훈이 설립한 정주 오산학교 교장에 취임하여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한 민족주의 교육을 실시하였고 1919년 삼일운동 직후 상해로 망명하려 준비하다가 체포되어 1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오산학교 교장으로 취임하였으나 일제가 승인하지 않아 결국 사임하고 평양으로 내려 와 1922년 평양 산정현교회 장로로 취임하였고 평양 기독교청년회(YMCA) 총무가 되어 시민 사회운동을 전개하였다. 그의 운동 범위는 평양을 넘어 전국적인 것이었고 그 내용도 다양하였다.
그가 제일 먼저 시작한 것이 ‘물산장려운동’이다. 국산품 애용을 기본 취지로 삼는 이 운동은 1920년부터 평양에서 발의되어 전국으로 확산, 1923년 2월 20여 개 민족단체 소속 3,000여 명이 서울에 모여 조선물산장려회를 조직하였는데 조만식이 초대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이 때 조만식이 직접 작사하여 만든 를 보급하였는데 그 1절은 이렇다.
“산에서 금이 나고 바다에 고기
들에서 쌀이 나고 목화도 난다.
먹고 남고 입고 남고 쓰고도 남을
물건을 낳아 주는 삼천리 강산.”
우리나라에서 나는 것으로 써도 충분하니 외국, 특히 일본에서 건너온 것을 사용하지 말자는 내용이다. 그러면서 물자 절약과 검박한 생활 문화를 강조하였다. 물산장려회의 기본 실천 강령을 보면, 첫째 의복은 남자는 무명베 두루마기를, 여자는 검정물감을 들인 무명치마를 입는다. 둘째 설탕-소금-과일-음료를 제외한 나머지 음식물은 모두 우리 것을 사 쓴다. 셋째 일상용품은 우리 토산품을 상용하되, 부득이한 경우 외국산품을 사용하더라도 경제적 실용품을 써서 가급적 절약을 한다. 이 세 가지가 ‘조선물산장려운동’의 기본정신이었다. 이는 우리나라 것을 사랑하고 애용하자는 정신적 애국운동이자 실천적인 면에서 ‘일본 상품 배격운동’으로 연결되어 경제적 항일저항운동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물산장려운동으로 ‘조선의 간디’란 별명을 얻게 된 조만식은 전국적인 인사가 되었고 곧바로 조선민립대학기성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는 일제가 한국인들의 교육 수준을 낮춰 잡아 한반도에는 대학 수준의 고등교육기관을 설립하지 않고 전문학교 정도만 설립 허가를 하였던 바, 순수 조선 민간의 힘으로 대학교를 설립하고 유등한 조선인 학자들을 교수로 초빙하여 고급 교육을 실시하자는 운동이었다.
민립대학 설립을 위한 전국적인 모금이 시작되었고 이 역시 민족저항운동의 성격을 띠게 되자 총독부에서는 경성제국대학을 설립하는 것으로 이 운동의 열기를 막아버렸다. 결과적으로 오늘의 서울대학교로 발전하는 경성제국대학은 민립대학기성운동의 부산물이라 할 수 있다. 이후 신간회 평양지회장, 관서체육회장 등을 역임하고 오산학교 교장으로 다시 복직되었으나 1929년 광주학생운동 여파로 사임할 수밖에 없었고 경영 위기에 처한 민족주의 계열 언론지 사장을 맡기도 했다.
해방 후 조선민주당을 창당, 북한의 민족주의 세력을 규합하여 김일성의 공산주의 세력에 대항하다 희생되기까지 민족‘은 ’신앙‘과 함께 그의 삶을 지탱하는 기둥이었다. 이해 12월말 소련 군정관은 다시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에 따라 찬탁(贊託)을 강요했으나, 단호히 거부했고, 1946년 2월 초에 무장한 군대로 평남 인민정치위원회 건물을 포위하고 위원장 조만식의 찬탁선언을 강요했으나, “대포를 갖대대면 겁낼 줄 아느냐!” 하는 호령을 남기고 유유히 회장을 물러나갔다. 이로 인해 조만식은 당일로 거처인 고려호텔에 연금된 채 외부와의 접촉이 무력으로 단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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