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산 조봉암의 사상과 개혁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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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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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죽산 조봉암의 사상과 개혁론
1. 서론
금세기 세계 최고의 지성이며 영국의 저명한 경제사학자 에릭 홉스봄(Eric Hobsbawm)은 20세기를 극단의 시대(Age of Extremes)라고 명명했다. 지금껏 인류가 경험하지 못했던 수많은 사건들이 지난 100년안에 다양하게 일어났었고, 그 유산들을 통해 현재의 21세기를 만들고,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극단’이라고 지칭한 그 100년은 인간 본연의 가치를 중요시 여기는 가치를 통한 다양한 혁명들의 위치를 확고히 다지며 시작되었다. 세계혁명에서 시작하여 대공황이라고 하는 심각한 경제적 추락을 경험하게 되었고, 자유주의의 몰락과 함께 국가적인 위기를 맞은 유럽의 몇몇 국가들은 파시즘을 바탕으로한 극우주의자들에 의해 인간 존엄과 가치를 침해하는 일을 벌이기도 한다. 이른바 ‘제국주의’라고 명명한, 당시로서는 그다지 비도덕적이지 않았던 시대적 조류의 흐름은 지구를 반바퀴 돌아 한반도에까지 다다르게 되고, 이전까지 세계적인 사상의 흐름과 단절되어있던 한반도는 급작스레 들어닥치는 다양한 사상과 가치들의 유입으로 인한 혼란과 가치분열이 일어나게 된다.
竹山 조봉암은 이와 같은 극단의 시대가 막을 올리는 1899년 9월 25일 제국주의의 침략적 극단 세력이 한반도 상륙의 첫발을 닫던 강화도에서 반식민지 봉건사회의 빈곤의 극단점인 빈농가의 후예로 태어났다. 훗날 공산주의를 바탕으로 사상을 닦아 이름을 내고, 초대내각 장관에 오르며 국회의 부의장까지 지내게 되는 그가 대통령 후보에 올라 2위 자리를 차지하게 되고, 당시로썬 입에 올리는 것은 상상조차 못했던 ‘평화통일론’을 주창하며 당시 국가의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의 ‘북진통일론’에 정면 대응했던 그의 사상적 당당함은 과연 어디서 나온 것일까. 결국 이른바 ‘법살(法殺)’이라 일컫는 재판을 통해 서대문 형무소의 이슬로 사라지기까지 그의 행적의 바탕이 되어 주었던 사상의 뿌리와 그 가지들에 대해 살펴보는 것은 사상의 자유가 주어진 오늘날 살펴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2. 조봉암의 생애와 업적
1898년 인천 강화에서 출생한 조봉암(曺奉岩)의 본관은 창녕(昌寧)이며, 호는 죽산(竹山)이다. 강화에서 보통학교와 농업학교를 졸업한 뒤, 군청에서 일하다가 상경하여 YMCA 중학부에서 1년간 수학한 후 1919년 31운동에 참가하여 1년 동안 복역하였다. 일본 주오[中央]대학에서 1년간 정치학을 공부하고 비밀결사 흑도회에 참여하여 사회주의사상에 입각한 독립쟁취를 목표로 항일운동을 하다가 귀국하였다. 1925년 조선공산당 조직에 참여하고, 고려공산청년회의 간부가 되었다. 그 해 공산청년회 대표로 중국 상하이를 거쳐 소련의 모스크바로 가서 코민테른 총회에 참석하고,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서 2년간 수학하고 귀국하였다. 그 후 노농총연맹조선총동맹을 조직하여 문화부책으로 활약하다가 상하이에 가서 코민테른 원동부 조선대표에 임명되고, ML당을 조직하여 활동하다가 일본경찰에 검거되어 신의주형무소에서 7년간 복역하였다. 출옥 후 인천에서 지하운동을 하다가 다시 검거되었으나 8 15광복으로 출감, 인천에서 치안유지회건국준비위원회노동조합실업자대책위원회 등을 조직하고, 조선공산당 중앙간부 겸 인천지구 민전의장에 취임하였다. 1946년 박헌영에게 충고하는 공개서한을 발표하고 공산당을 탈당하여 우익진영으로 급선회하였다. 1948년 제헌의원초대 농림부장관이 되고, 1950년 제2대 국회의원에 재선되어 국회 부의장에 선출되었다. 1952년 제2대 대통령에 출마하여 차점으로 낙선, 1956년 다시 제3대 대통령에 출마하였으나 낙선되었다. 그 해 진보당을 창당, 위원장이 되어 정당활동을 하다가 1958년 1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대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처형되었다.
3. 竹山 조봉암의 사상 형성 과정
3.1. 유년기에 형성된 사상적 토대
竹山은 자신의 유년기에 대해 비교적 소상한 기록들을 남겨놓고 있다. 그는 1957년 희망 2,3,5월호에 자전적 기록의 성격을 가진 「내가 걸어온 길」에 그의 어린시절에 대해 비교적 소상히 기술하고 있다.
「··· 우리 집은 구차스럽기는 해도 평화스러웠다. 어머니는 좀 사나우신 편이지만 아버지께서는 거의 절대적인 평화주의자이셨다. 그저 착하기만 하셔서 집안사람에게나 동리 사람에게나 도무지 남과 시비를 하시는 일이 없으셨다. 그 덕분으로 나는 자유로운 가정 분위기 속에서 자유롭게 자랐다. 집안 살림이 가난하기는 해도 마음에 구김살 없이 의젓하게 자랐다. 4년제 소학교와 2년제 농업보습학교를 마치고는 공부할 것은 단념해 버리고 열네 살부터 직업을 구하러 나서지 않으면 안되었다. 6년제 학교하고 다니기는 했는데 성적은 결코 양호한 편이 아니었다. 아침에 책보를 들고 학교를 가서 책보를 펼쳐 놨다가 하학해서 책보를 싸들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다시는 책보를 펴보지도 않고, 그 이튿날 책보를 그대로 들고 학교로 간다. 나는 6년 동안에 몇 번쯤 우리 형님에게 붙들려 머리를 쥐어 박히면서 몇 십분씩 무엇을 좀 읽어본 것 이외에는 복습이라고는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 성적이 양호하지 못한 것은 불문가지다. 그러나 늘 아주 꼴찌는 면했다. 공부하는 성적은 그러하나 장난꾼으로서는 실력은 성적도 우수한 편이었다. 학교 유리창이 깨지면 조봉암을 부르고 어디서나 학생이 울고 있으면 조봉암을 불렀다. 형세가 이쯤 되고 보니 동리아이들의 머리가 터져도 먼저 봉암이를 부르게 되고, 동리 장독이 깨어져도 먼저 봉암이를 찾게끔 되었다.
먼저 말씀드린 것 같이 우리 아버지께서 나에게 대해서 전연 불간섭주의시니까 꾸중을 듣는 일도 없지만 어머니께서는 나를 몹시 사랑하긴 하셨어도 입에서 꾸중하는 말씀이 떠날 새가 없으셨고 부지깽이를 들고 대문 밖까지 쫓아나오시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봉암이가 우리 애 머리를 깨었소, 우리 집 돌담을 허물었소, 우리 애 옷을 찢었소 하고 동리 여인들이 날마다 백활을 하게 되니 우리 어머니는 집집에 찾아다니며 사과를 하고 큰 것은 배상을 해 주어야 되고, 작은 것은 고쳐 주어야 되었으니 역정이 안 나실 수가 없고, 꾸지람이 아니 나실 수가 없으셨다. 그러나 나는 우리 어머니를 두려워하지 아니했다. 꾸중을 하시면 다소곳이 듣고 자막대기로 좀 치실 때는 엄살을 해 맞기도 하지만 부지깽이로 단단히 치실 듯하면 밖으로 튀어 나갔다가 한 두시간 뒤에 슬금슬금 어머니 눈치를 보면서 집안으로 들어가면 그동안에 모든 것을 다 잊으신 듯이 부지깽이도 안 들으시고 꾸지람도 안하시고 밥때면 밥상을 놓아주시고 잘 때면 이부자리를 보아주시는 우리 어머니였다.
그러나 우리 형님은 무서웠다. 자기 사정이 바빠서 집안 일은 잘 모르지만 내 장난이 심해서 어머니께서 몹시 걱정을 하시고 고생을 하신다는 것쯤은 물론 잘 아는 터이고, 또 공부라고는 도무지 안한다는 것은 충분히 알고 있는 까닭에 언제든지 나를 만나기만 하면 몹시 꾸짖기도 하고 가끔 두들겨 패기도 했다. 하루는 내가 장난질 하다가 왼 팔을 삐어서 끈으로 팔을 둘러매고 있을 때 형님을 만났다. 우리 형님은 그렇지 않아도 좀 때려 줄 일이 있었던 판에 또 무슨 못된 장난을 쳐서 팔까지 매고 있는 내 꼴을 보니, 더욱 미움이 북받쳐서 다짜고짜 때리기 시작한다. 나는 형세가 급함을 직감하고 밖으로 뛰어 달아났다. 만약 얻어 맞기나 하면 또 모르겠는데 도망쳐 달아나는 것을 보니까 더울 미워서 사랑방 헛마루에 있던 고무래를 들어서 힘껏 던졌다. 그런데 그 고무래 자루가 마침 뛰어 달리고 있는 내 엉치뼈 끝에 맞았다. 어찌 아픈지 앞으로 꼭 고꾸라졌다가 다시 급히 일어나서 뛰었는데 뛰면서 보니까 지금까지 아파서 못견디던 왼팔이 거뜬해져서 두 팔로 활개를 치며 달릴 수가 있었다. 위골이 된 것을 엄살을 부리고 맞추지 않고 있다가 넘어지는 바람에 뼈가 도로 들어 맞은 것이었다. 노여움이 상투 끝까지 올랐던 우리 형님도 이 꼴을 보고는 한참이나 껄껄되고 웃었다. 우리 형님은 내 장난이 심한 것을 미워했을 뿐 아니라, 내가 공부도 아니 하려니와 좀 바보가 아닌가 하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내 또래의 누구누구를 가리키면서 그 애들은 머리가 좋고 무엇도 알고, 무엇도 잘 하는데 너는 그렇지 못하다고 나무라는 일이 가끔 있었다. 그러나 내가 알기에는 그 애들이야말로 머리도 그리 좇지 못하고 무엇 잘 하는 것도 없는 패들이었다. 그래서 나는 우리 형님이 내게 대해서 약간 인식이 부족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에 형님이 꾸짖고 대려도 한번도 항복하는 일이 없었다. 그런데 우리 형님이 내가 열여덟살 되던 해부터는 또 너무 과하게 그야말로 과대평가를 해가지고 세상에는 없는 동생같이 아끼고 사랑하기를 마치 늙은이가 막내를 사랑하듯 했었다. 그러던 그 형님이 이미 고인이 되었으니, 지하에서나 이 장난꾼 동생의 회고담을 듣고 웃어 주실는지.........]
누구나 그러하듯이 조봉암 역시 가정내에서의 일차교육을 통해 자신의 내면세계를 형성해 나가게 된다. 엄한 어머니와 자유롭고 평화로운 아버지 사이에서 그의 내면세계는 자유와 평화, 사랑과 연민의 끝없는 확장등을 경험하게 되고, 이를 통해 훗날 그것의 인간적 실천의 승화를 이루게까지 되는 것이다. 인간 심성과 덕성 형성의 유년시절 가족사의 회고를 통해 우리는 그의 사상적 배경을 알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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