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던타임스와 노동소외

 1  모던타임스와 노동소외-1
 2  모던타임스와 노동소외-2
 3  모던타임스와 노동소외-3
 4  모던타임스와 노동소외-4
※ 미리보기 이미지는 최대 20페이지까지만 지원합니다.
  • 분야
  • 등록일
  • 페이지/형식
  • 구매가격
  • 적립금
자료 다운로드  네이버 로그인
소개글
모던타임스와 노동소외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모던 타임즈와 노동소외
소외는 한마디로 자신이 창조한 것이 도리어 자신을 지배하게 되는 현상, 혹은 수단이 목적화 되는 현상으로, 예를 들어 인간의 편리를 위해 창조한 돈이 결국 인간을 지배하고 그것 때문에 인간이 불행해 지고 죽고 하는 식의 결과가 되는 모든 현상을 말한다.
그중 산업화로 인한 인간 소외는 주로 마르크스가 다룬 주제로, 삶의 수단인 노동이 결국 삶의 목적이 되고(노동이 지나치게 되면 삶의 도구라기보다 삶의 주인이 됨), 사람이 가치 창출의 수단으로 전락하는(회사에 있어서 사람은 재화 창출의 수단이 됨) 등의 현상을 말하는데 이런 현상은 산업화로 인해 가속화 된다는 논리이다. 특히 노동이 상품화 되면서 인간의 소외현상은 더욱 심화된다고 할 수 있는데 특히 요즘 몸값이니 개인의 브랜드 가치니 혹은 성의 상품화와 같은 단어들이 나오면서 사람이 상품화 되어 있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한다.
하지만 철학자들이 걱정하는 것처럼 인간 소외가 인류에게 치명적일 정도로 심화될 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이런 식의 현상에 대해 근원적으로 거부감을 갖고 있기 때문에 고작 산업화라는 것이 근본적인 인간의 가치관을 무너뜨린다는 것도 쉽게 납득이 가지 않을 뿐더러, 또한 산업화는 자동화와 효율화로 인하여 인간 삶의 풍족함과 여유로움을 더해 줌으로써 점점 인간이 노동으로부터 해방되는 방향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모던 타임즈의 줄거리를 살펴보면 컨베이어 벨트 공장에서 일하고 있는 찰리는 하루 종일 나사못 조이는 일을 하고 있다. 찰리는 단순 작업의 결과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조여 버리는 강박 관념에 빠지고 결국 정신이 이상해져서 급기야 정신 병원까지 가게 된다. 병원에서 퇴원한 그는 일자리가 없어 거리를 방황하다가 시위 군중에 휩싸여 감옥에 끌려가게 된다. 몇 년의 감옥살이 끝에 풀려난 찰리는 빵을 훔친 예쁜 소녀를 도와준다. 근사한 집을 사기 위해 백화점 경비원으로 취직하기도 하고, 철공소에서 일을 하나 번번히 소동으로 막을 내린다. 소녀의 도움으로 카페에서 일하게 된 찰리는 자신을 추적하는 사람들에 아랑곳 않고 노래를 하다가 결국 다시 떠돌이로 남는다. 하지만 거리에 나선 찰리와 소녀는 결코 희망만은 버리지 않는다.
찰리 채플린의 영화 모던 타임즈는 제목 그대로 현대(modern times)에 관한 영화이다. 동시에 그것은 다양한 근대적 공간들(modern spaces)에 대한 영화이며, 그 근대적 공간들 사이를 부유하는 방랑자에 대한 영화이다. 아담 스미스는 그의 저서 국부론에서 부의 원천은 노동이고, 부의 증진은 노동 생산력의 개선으로 이루어진다고 주장하고 생산의 기초를 분업에 두었다. 그는 분업과 이에 기반 하는 기계의 채용을 위해서는 자본의 축척이 필요하며, 자유경쟁에 의해서 자본 축척을 꾀하는 것이 국부 증진의 정도라고 역설하기도 했다.
자본주의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막스 베버가 자본주의의 긍정적 가치를 존중했다면 찰리 채플린(모던 타임즈) 같은 경우는 자본주의 많은 문제점을 고발한 작품이다. 자본주의의 출발은 노동자들에게는 주어진 직업을 천직으로 삼도록 강요했으며, 자신의 욕구와 욕망을 억제하고 고된 노동을 견뎌내는 ethos를 만들어 냈다. 그러나 이러한 習俗은 포드주의(Ford system)가 생산에 도입되면서 크게 달라졌다. 이런 점에서 그것은 자본주의의 이상을 컨베이어 벨트와 대규모 기계 등을 통해 실현시키는 체제임에 틀림없었다. 포드 시스템은 ‘일에 사람을 가져가는’ 대신 ‘사람에게 일을 가져가는’ 포드의 착상을 실현시킨 시스템이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서 영화-모던 타임즈의 문제가 발생한다. 현대가 인간의 작업능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기계에 의해서 인간의 작업을 좌우하며, 단순노동을 증가하여 인간을 기계의 일부로 만든다는 비난이 바로 찰리 채플린의 목소리였다.
현대(modern times)는 생산과정에 대한 노동자의 참여를 이끌어내는데 실패했고, 노동의 파편화, 단조로움, 노동 강화 및 노동의 위계적 차별을 진전시켜 노동의 비인간화를 가져왔다. 그리고 극단적인 표준화에 의한 경직성, 부품생산과 최종조립의 불균형, 부품의 과잉생산, 노동의 세분화와 경영으로부터의 배제에 의한 노동규율의 저하를 피할 수 없었다. 또한 그렇게 컨베이어 벨트와 대규모 기계를 통해서 지속적으로 과잉 생산된 상품은 수요를 창출하지 못했다. 이로 인해 자금난에 허덕이는 회사들은 인력을 더더욱 감축하고 그것을 노동자의 임금을 삭감하거나 해고하는 것으로 해결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시장에서의 수요를 더욱 감소시키는 일이 되었고 이러한 악순환의 고리가 계속 반복되면서 미국경제는 그야말로 암흑으로 치 닫아 대공황으로 폭발하였다. 대공황은 대량으로 거지, 도둑, 부랑자를 만들어내어 혼돈의 모던 타임즈로 도래하게 만든 것이다. 그래서 영화 속 소녀처럼 빵을 훔쳐 먹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자본주의는 그 본질 상 이러한 분열적 흐름을 생산할 수밖에 없었다. 대공황은 극심한 경기 침체와 높은 실업률, 그리고 심각한 디플레이션을 동반한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경기순환 과정에서 나타나는 경기하강 (slowdown)이나 불황(recession)과는 구별되는 매우 심각한 경기침체를 가리켰다. 참고로 1930년대 대공황기의 경기침체의 심각성을 살펴보면, 1929∼32년의 3년간 세계 전체의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약 -13%였으며 주요 선진국의 실업률은15~44%에 달했으며, 연평균 디플레이션은 약 18%였다고 한다. 자본가들이 꿈꾸던 오랜 장밋빛 꿈은 근대적 공간들 사이를 떠돌아다니는 방랑자를 만들어 냈을 뿐이었다.
모던 타임즈에서 가장 유명한 씬 중의 하나가 바로 컨베이어 씬 이다. 찰리 앞으로 조립할 부품이 차례로 떠밀려오고 찰리는 컨베이어 벨트를 따라 흘러가는 기계에 볼트를 조인다. 잠시라도 한 눈을 팔면 조여야 할 기계는 저만치 지나가 버리기 때문에 동료와 다투는 것마저도 기계에 묶어 있어야한다. 결국 컨베이어 벨트 안에서 단순 작업을 하던 찰리는 볼트 뿐 만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조이려고 들고 신경 쇠약으로 병원에 입원하기에 이른다. 여기서 찰리의 손은 의식의 통제를 벗어난 무의식으로 작동하는 손에 지나지 않는다. 거기서 움직이는 손은 이미 찰리의 것이 아니라 자본가의 것이며 포드 테일러의 것이다. 여기서 보여주고 있는 것은 포드주의 (Ford system)는 이미 그 자체로 신체를 통제하는 권력(자본가의 의지대로 길들이고 작동하려고 하는 것)이란 것이다.
모던 타임즈는 화면을 가득 채운 시계를 타이틀 백으로 하여 시작한다. 모던 타임즈가 근대적 시간을 뜻하는 것은 결코 은유가 아니다. 이것은 근대가 근대적 시간을 통해서 시작했다고 주장하는 셈이다. 영화 속 노동자들은 축사로 끌려가는 양떼처럼 공장으로 끌려 들어가고 자본가는 커다란 스크린을 통해서 노동자들을 감시한다. 근대적 시간이 인간관계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은 인간들 간의 접촉을 최소화하는 비인간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에서 인간이 무인 기술로 대체되는 것은 로봇과 컴퓨터가 인간보다 더 통제하기 쉽기 때문이다. 효율성에 대한 강조가 확산, 기계화는 인간에게 로봇 같은 노동자의 생산을 가져왔다. 조립라인은 분명히 비인간적인 작업환경이다. 그것은 광범위한 숙련과 능력을 가진 인간에게 제한된 수의 매우 단순화된 업무만을 반복적으로 수행할 것을 요구한다. 즉 인간이 작업에서 그의 능력을 발휘하도록 하기 보다는 인간성을 거부하고 로봇처럼 행동하도록 강요한다. 조립라인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표현할 수가 없다. 조립 라인의 작업에 인간의 창의성이란 것은 개입할 여지가 없고 필요하지도 않다. 그저 기계처럼 단순 반복 작업만을 하게 된다.
모던 타임즈에서의 현대성이란 인간이 기계에 그리고 작업에 동화되어 가면서 인간이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일이 인간을 조종하는 사회를 풍자한 것이다. 이 영화가 만들어진 1936년에서 반세기가 훨씬 지난 지금까지 1936년 식 자본주의의 병폐를 꼬집고 인간의 기계화를 비판한 영화가 아직까지 유효한 것은 너무나 슬픈 일인지도 모른다. 인간이 도구로 전락해버린 영화 속 쓸쓸한 주인공 찰리는 바로 현대의 노동자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