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학사상의 집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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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실학사상의 집대성
실학의 등장
실학사상은 임진왜란 이후 싹이 터서 영정조 임금 때 가장 활발했다. 조선왕조 500년은 임진왜란을 기준으로 전기와 후기로 나뉜다. 앞 장에서 다루었던 성리학이 조선 전기를 대표한다면 조선 후기는 바로 실학에 주목한 시기다. 물론 성리학도 나름대로 철학적 체계를 갖추면서 조선후기로 이어졌지만 조선 후기의 사회변화를 제대로 읽어 내지 못한 측면이 있었고 그 자리를 실학이 대신한 것이다. 시대가 변하면서 시대 문제를 안고 고민하는 철학도 함께 변한 것이다. 『한국철학 스케치 2』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지음, 풀빛, 6부_조선후기의 실학사상, 11쪽, 2007년
이러한 사회 분위기속에서 등장한 것이 바로 실학사상인데, 실학은 당시 성리학자들이 현실과 동떨어진 논쟁만 일삼고 백성들이 겪고 있는 어려움에 대해서 좋은 해결 방법을 내놓지 못한 것을 비판하면서 일어난 새로운 사상이다. 『한국철학 스케치 2』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지음, 풀빛, 6부_조선후기의 실학사상, 13쪽, 2007년
실학이 발생했던 사회경제적인 배경은 오랜 전쟁으로 농사를 지을 수 없게 되자 자연히 토지가 황폐되고 식량 생산량도 줄어들어 백성들의 생활이 어렵게 된 상황부터 시작된다. 후에 국가의 틀을 다시 바로 잡기 위한 부단한 노력으로 농업 기술이 발달하게 되어 수확량이 많아지고 한 사람이 보다 많은 토지도 경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자기 토지를 가진 농민 중에서 몇몇은 더 많은 토지를 갖게 되어 부자가 되기도 했지만 실제로 자기 토지를 경작하는 농민은 전체의 25%에 지나지 않았다. 70%가 소작농이 되어 지주들의 토지에 묶여 있었다. 고로 농민들은 땀 흘려 일하고도 제대로 대가를 받을 수 없었고 땅 주인은 놀고 앉아서 배불리 먹고도 더 큰 부자가 되었다. 『한국철학 스케치 2』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지음, 풀빛, 6부_조선후기의 실학사상, 13쪽, 2007년
이러한 사회경제적 변화 속에서 등장한 실학은 유교적 경세론을 바탕으로 부국강병과 국민의 화합을 추구한 점진적 개혁사상으로 당시 조선 사회의 현실적 문제들에 대해 해결책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특히 실학 사상가들은 사회적 특권을 가진 양반 계급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양반의 특권의 식에 사로잡히지 않고 신분제 사회가 갖는 불평등은 분명하게 읽어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한국철학 스케치 2』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지음, 풀빛, 6부_조선후기의 실학사상, 14쪽, 2007년
정약용의 실학
그는 유학을 근본으로 하지만 청나라의 실학사상과 서양의 천주교 및 과학사상의 영향을 받았다. 유학에 대해서도 주자학의 문제점을 지적했으며 양명학의 장점을 수용하기도 했다. 정약용은 유학의 근본정신이 ‘올바름을 사회현실에서 실천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실천을 강조한 양명학에 대해서도 긍정적으로 보았다. 또 천주교의 영향으로 인간이 착하면 상을 내리고 나쁜 짓을 하면 벌을 내리는 하늘을 생각했다.
정약용은 “참된 유학이란 본래 백성들을 편안히 하고, 오랑캐를 물리쳐 나라를 지키며, 넉넉한 경제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유학자들은 그런 것들은 별로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고 비판하며 백성들을 위한 학문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과학과 기술을 개발하고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길을 열심히 연구했다. 『한국철학 스케치 2』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지음, 풀빛, 6부_조선후기의 실학사상, 31쪽, 2007년
정약용이 쓴 일표이서의 내용을 보면 그가 백성들을 얼마나 사랑하고 걱정했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의 학문의 목표는 바로 굶주리고 헐벗은 백성들을 보호하고 썩을 대로 썩은 국가 정치를 바로잡는 데 있었다. 일표이서는 정약용의 대표적 저서인 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를 함께 일컫는 말로 각 책 제목의 끝 글자를 따서 일표이서라 한 것이다.
정약용의 철학
정약용은 성리학에서 믿어 의심치 않았던 여러 생각을 찬찬히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그는 먼저 ‘인간은 도덕적이기만 한 것인가?’라는 물음을 던졌다. 이에 대해 정약용은 인간 본성은 이미 하늘의 이치가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에 동의하지 않았다. 인간 성품이란 마음이 즐겨 좋아하는 것, 즉 기호에 불과하다고 했다. 어떤 사람은 키 크고 마른 사람을 좋아하고 어떤 사람은 키 작고 마르지 않은 사람을 좋아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무엇을 좋아하느냐는 결국 선택의 문제일 뿐이다. 그래서 정약용은 기호를 버리고 인간의 성품을 말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보았다. 그래서 ‘성은 기호다’라는 주장은 ‘성은 곧 인간 마음속에 있는 천리다.’라는 성리학의 근본 전제를 거부한 것이다. 당시 조선사회가 성리학을 정치이념으로 해 성리학적 사회를 만들려고 했던 점을 생각한다면, 정약용이 성리학에 대해서 품은 의심은 엄청난 주장이 아닐 수 없다. 정약용은 인의 등의 성이 본래 갖추어져 있는 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보았다. 인은 사람이 서로 관계맺음 하는 그 생생한 삶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지 마음속에 있지 않다고 했다. 그렇다면 주자학처럼 자기 마음속 리를 열심히 살필 것이 아니라 현실 생활 속에서 인을 실천하기 위해 더 노력해야만 인의라는 결과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한국철학 스케치 2』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지음, 풀빛, 6부_조선후기의 실학사상, 35쪽, 2007년
이렇게 정약용은 인간은 스스로 선을 실현하려는 의욕으로 선을 행하고 악을 범하려는 의욕으로 악을 행한다고 하면서 인간은 자신의 의욕에 따라 행동을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인 자주의 권능을 가졌다고 선언했다. 이를 정약용은 인심과 도심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도덕적인 마음만이 아니라 인간의 몸과 감정 또한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도덕적으로 옳은 것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맛있는 음식을 먹고 따뜻하게 지내는 것도 인간에게는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인정하였다. 이를 토대로 정약용은 인간은 선도 악도 모두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자율적인 주체라고 했다. 하지만 악도 자신이 선택하면 마음대로 할 수 있으니 해도 좋다는 뜻은 아니다. 정약용은 “인간은 도심과 인심을 다 가지고 있다. 인간에게는 착한 것과 나쁜 것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래서 좋아하고 하고 싶어 하는 일이 착한 일인지 나쁜 일인지 구별할 수 있다.”라고 하면서 인간이 선악을 선별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은 곧 아무리 악한 짓을 일삼는 사람일지라도 선한 행위를 일깨워 줄 때 부끄러워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고 했다. 예를 들면 누구라도 도둑질을 자랑스레 드러내 놓고 하지 않는 것을 보면 누구나 선을 즐거워하고 악을 부끄러워하는 경향성을 갖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정약용은 “선을 행하는 것은 자신의 공이고 악을 행하는 것은 자신의 죄다.”라는 마로가 함께 사람이 열심히 노력해서 물질적으로 풍요롭게 사는 것은 얼마든지 인정하지만, 도둑질 같은 악한 행동으로 자신의 배를 채우는 것은 허용하지 않았다.
참고문헌
※ 참고자료
『한국철학 스케치 2』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지음, 풀빛, 2007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