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의 호남사상-백제의 사상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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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의 호남사상-백제의 사상을 중심으로
백제는 한반도의 서남쪽에 위치하며 고구려, 신라와 함께 이른바 삼국시대(三國時代)를 형성하다가 서기 660년 신라에 의해 멸망했다. 몇 차례를 거쳐 국호(國號)를 바꿨으나 가장 일반적으로 백제(百濟)라 불리웠다. 백제라는 국호의 의미에 대해서는 기록에 따라 설명이 조금씩 다르지만, 한국고대사의 기초자료인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백제의 시조 온조왕(溫祚王)이 그의 형인 비류(沸流)가 다스리던 백성을 합쳐 더 큰 나라를 만들 때 비류의 백성들이 모두 즐거워하여서 나라 이름을 백제로 고쳤다는 설명이 있고, 중국의 역사서인 수서(隋書)에는 백여 호(戶)가 바다를 건너[百家濟海] 남하하여 나라를 세웠기 때문에 백제라고 하였다고 쓰여 있다.
[출처 http://baekje.chungnam.net/histor]
백제의 최대 전성기는 근초고왕(近肖古王)때로 왕권의 강화와 지방 통제력의 강화를 기반으로 정복사업에 나서서 경기 충청 전라 3도의 전부와 낙동강 중류의 일부지역, 강원황해 양도의 일부 및 중국 요서 지방과 일본열도에 이르는 큰 영토를 차지하게 되었다. 대내적 팽창과 발전 위에 근초고왕은 박사 고흥(高興)으로 하여금 서기(書記)를 편찬하게 하여 왕실의 권위를 확립하였다.
침류왕(枕流王)대에는 불교를 공인함으로써 영토와 강화된 왕권을 지지하는 고대국가 이데올로기를 확립하여 보편적인 세계관의 형성을 이룩하였다.
한반도의 서남쪽에 위치 백제 즉 호남은 지리학적으로 매우 다채로운 역사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서남쪽에 위치하여 평야와 큰 하천이 많았으며, 토지가 비옥해 그로 인한 생산력이 풍요하였고 이러한 지리적 요건은 풍요를 탐하는 수탈이 동반되었다.
서해를 통해 외국 특히 중국대륙과의 교통이 편리했으며, 해안선의 굴곡과, 항만이 연달아 있는 지리적 기반으로 일본 중국과의 교류가 활발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지리와 역사는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또한 지리가 역사를 지배하지는 못하는 것 같다.
이러한 지리학적 요지에 위치한 호남은 사상적으로 매우 다채로운 역사를 가진 지방이며 대표적인 여러 사상이 여기서 싹텄고 불교사상, 유교사상,도교사상 등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먼저 백제의 유교사상을 보면, 백제는 유교식 예제나 윤리도덕을 수용한 것을 알수있다. 부모나 남편이 죽으면 3년상을 치르게 하였으며, 백제왕은 매년 사중(四仲)의 月에 천신(天神)과 오제(五帝)의 神을 제사했다는 기록이 있다.
천신(天神) 및 오제(五帝)의 신이란 본디 주례(周禮)의 제사 규정에 의거한 것으로, 유교경전에 말하는 국가의례를 실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백제에서는 유교이념의 구체적인 실현인 인정(仁政)이 행해지고 있었다. 비류왕대 왕이 사람을 보내 백성의 괴로움을 묻어보게 하고 홀아비·과부·고아·자식 없는 사람으로 자활할 수 없는 자에게 곡식 3석씩을 주도록 하였는데, 이는 {맹자}에서 말하는 천하에 의지할 곳없는 궁민(窮民)을 우선적으로 보살피라는 인정(仁政)을 받아들인 것이다. 또한 백제에서는 풍년과 흉년에 따라 세금을 차등 있게 징수하였다고 하는데, 형벌을 덜고 세금을 적게 거두어들이는 것은 유교사상의 핵심이 된다. 백제에서는 정치이념으로서 유교를 채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근초고왕때 아직기는 왕명을 받들어 일본에 건너가 왜왕에게 말 2필을 선사한 후 말 기르는 일과 승마술을 전했으며 왜왕에게 깊은 학문을 인정받아 태자의 스승이 되었으며 왕인을추천하여 일본에 한학을 전하였다. 이처럼 아직기와 왕인은 백제의 선진 기술과 문화를 일본에 전파시켰다.
그 뒤 무녕왕 때 오경박사 단양이(段楊爾)와 고안무(高安茂)를, 성왕 때에는 오경박사인 마정안(馬丁安)과 왕유귀(王柳貴)를 보낸 일이 있다. 이처럼 백제는 중국의 문물을 신라나 일본에 전달하는 매개역할을 하였다.
또한 중국의 박사제도를 수용한 것으로 백제에서는 고구려와 같이 율령국가 정비기에 시행한 것이다. 백제는 한문학뿐만 아니라 유교의 경전인 오경(五經)과 제자(諸子)·역사(歷史)가 수용되어 현실절치에 이용하였고 일본에까지 전래하는 유교문화의 성숙함을 보여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