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의 호남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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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삼국시대의 호남사상
1. 백제사상의 원류
1)유교
한자는 이미 백제 건국 이전에 전래되었다. 한문이 사용됨에 따라 한문학이 발달하게 되었다. 개로왕이 458년 남조의 송, 472년 북조의 북위에 보낸 국서라든지 혹은 7세기 중엽 대좌평 사택지적의 발원으로 제작된 당탑 건립 비문 등은 한문화의 수준을 대표하는 것이다. 이러한 한문화의 수용은 유교문화의 수용을 가능하게 하였다. 우선 백제는 유교식 예제나 윤리도덕을 수용하였다. 유교식 예제(禮制)인 혼례는 중국과 비슷하였고 상례(喪禮)는 고구려와 같았다. 부모나 남편이 죽으면 3년복을 입고 나머지 친족은 장사를 치르고 바로 복을 벗었다고 한다. 또한 백제에는 효와 충이라는 윤리에 충실한 많은 충신 효자를 배출하였다. 의자왕대 좌평 성충은 죽음을 무릅쓰고 간언하였다가 옥사하였고, 계백은 5천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백제의 사직과 함께 장렬히 전사하였다. 의자왕은 백제의 마지막이지만 ‘부왕모후’를 성심껏 섬기고 형제끼리 우애가 있어 그를 ‘해동증자’라고 칭찬했다고 한다.
이러한 유교이념은 정치운영에도 반영되었다. 마한을 통합한 백제는 주례(周禮)에 입각한 통치체제의 정비를 기하였다. 주례는 이상적인 유교국가인 주(周)의 정치체제를 정리한 유교 경전의 하나이다. 사비시대 재상을 선출할 때 후보자 3,4명의 이름을 적어 밀봉하여 뒤에 도장이 찍혀 있는 사람을 뽑았다는 금강 대안의 바위를 ‘천정대 정사암’이라고 하는데, 이 천정(天政)이란 주례에서 연유한다. 또한 사비시대에 5,6명의 좌평이 재상으로 내관과 외관을 합친 22개의 관청을 지휘 감독했는데 외관10부 중에는 사도부, 사공부, 사관부, 사군부 등 주례에서 따온 것이 많다.
주례(周禮)에 의한 백제의 정치사상은 천지에 대한 제사의례에서도 볼 수 있다. 백제에서는 동명왕묘와 더불어 천지에 제사하였다. 온조왕 38년 10월에 왕은 도성 남쪽에 대단(大壇)을 쌓고 천지산천에 제사지냈다고 하는데, 역대국왕은 즉위한 정월에 동명왕묘를 참배한 다음 2월에는 천지에 대한 제사를 행하였다. 천신(天神)은 마한시대 천군(天君)이 제사한 것이라기보다는 중국의 사령(祠令)에 보이는 호천상제(昊天上帝)를 가리킨다. 오제(五帝)의 신은 오방신(五方神)을 가리키는데 이는 오방오행(五方五行)사상에 기원한 것이다. 그런데 천신 및 오제의 신이란 본디 주례의 제사 규정에 의거한 것으로, 유교경전에 말하는 국가의례를 실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백제에서는 유교이념의 구체적인 실현인 인정(仁政)이 행해지고 있었다. 비류왕대 왕이 사람을 보내 백성의 괴로움을 묻어보게 하고 홀아비·과부·고아·자식 없는 사람으로 자활할 수 없는 자에게 곡식 3석씩을 주도록 하였는데, 이는 {맹자}에서 말하는 천하에 의지할 곳 없는 궁민(窮民)을 우선적으로 보살피라는 인정(仁政)을 받아들인 것이다. 또한 백제에서는 풍년과 흉년에 따라 세금을 차등하여 징수하였다고 하는데, 형벌을 덜고 세금을 적게 거두어들이는 것은 유교사상의 핵심이 된다. 백제에서는 정치이념으로서 유교를 채택하고 있었던 것이다.
2)도교
백제문화 또는 백제사상의 연원은 지리적 및 역사적 배경 때문에 독자성보다는 잡다성의 조화에 의하여 이루어졌고, 다른 사상처럼 도가사상에서도 그 독자성의 추출하기가 극히 곤란하다. 백제는 마한시대부터 이미 해상을 통해 중국과의 많은 왕래가 있었으며 마한문화의 기반위에 출발하여, 중국 남조와의 직접적인 교섭을 가졌고 남조문물사상을 받아들였다. 이에 따라 백제는 중국의 사상과 문화를 접할 수 있었고 이 과정에서 도교를 수용하였다.
예를 들어 무령왕릉의 지석은 백제의 도교사상을 보여준다. 지석 끝에 음각된 매지문(買地文)에는 "부종율령(不從律令)"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도사들이 주문을 외울 때 마지막 대목에 으레 따라붙는 "극급여율령(急急如律令)"이란 구절을 백제 식으로 고친 것이다. 이는 지석과 함께 출토된 두 개의 구리거울에 "의자손수대경(宜子孫獸帶鏡)과 방격규구신수경(方格規矩神獸鏡)의 명문에 "상유선인부지노(上有仙人不知老)"라는 문구와 함께 도교신앙의 모습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또 1993년 부여 능산리 사지에서 발견된 ‘금동용봉래산향로’는 사비시대 도교신앙을 잘 보여준다. 향로의 몸체를 덮고 있는 몸체를 덮고 있는 뚜껑부분은 삼산형의 문양장식이 주조를 이루고 있으며 그 아래에는 다시 다섯 개의 산을 들리고 산꼭대기에 앉아 있거나 날아가는 새 모양을 조각해 놓았다. 바로 도교의 삼신산을 재현해 놓은 것이다. 이 향로는 사비시대 도교의 풍부한 상상력과 환상적 표현주의가 한껏 발휘된 최고의 명품이다.
백제문화는 강한 전통의 계승이나 토착인 문화의 강함보다는 외래문화에 대한 적극적인 이해와 기존문화와 신문화의 조화를 꾀하려는데 그 특성을 드러낸다. 이는 백제가 지정학적 위치 즉 북으로 고구려와 대결하고 동으로 신라와 대치해있으며 남으로는 일본과 통하고 서로는 중국과 교류하는 천하의 중앙에 위치했다. 따라서 백제는 이러한 지정학적 위치에서 선진문화를 중국과 고구려에서 받아들이고 독자적인 문화를 만들며 신라와 일본에 전파할 수 있었던 것이다.
3)불교
백제에 불교가 전래된 것은 침류왕 때에 인도의 승려 마라난타가 동진으로부터 들어오게 되면서였다. 이때 왕은 그를 맞이하여 궁중에 두고서 예(禮)로서 공경하였으며, 이듬해에는 서울에 절을 짓고 승려 열 명을 두었다. 이로부터 백제에는 왕실의 보호 하에 불교가 널리 퍼지게 되었다. 주서(周書)에 "승려와 절과 탑이 매우 많다"고 한 것이 그러한 사실을 잘 알려준다.
이러한 까닭에 백제의 불교는 개인의 현세이익을 구제하는 것보다는 나라의 평안과 발전을 비는 국가불교로서의 성격이 더욱 강하게 나타났다. 이점은 웅대한 규모를 자랑하는 불사의 조영사실에서 알 수 있다. 35년에 걸쳐 조성되었다는 왕흥사를 예로 들 수 있다. 다음으로 백제의 불교가 계율을 중시하였다는 점에서도 이해될 수 있다. 승려들이 지켜야 할 생활기준으로서의 계율을 강조하는 것은 곧 종교를 통한 인심의 귀일(歸一)이라는 정치적 의의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더불어 이상사회를 희구하는 미륵신앙이 유행하게 되는데, 이때의 국왕은 전륜성왕이 된다. 무왕이 익산에 세운 미륵사는 그 중심사찰이었다.
이렇듯 국가불교가 널리 성행하였지만 개인의 구제를 위한 대중신앙도 널리 유행하고 있었다. 중생이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관음보살의 이름을 부르게 되면 즉시 달려와서 구제해준다는 관음신앙, 아미타불이 있는 서방정토에 왕생하고자 하는 미타신앙, 중생이 질병으로 인한 고통에 처해 있을 때 이를 도와준다는 약사신앙 등이 그러한 예이다. 이상과 같은 백제의 불교는 이웃 나라인 일본에 전래되어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것은 현재 일본에 남아 있는 여러 유물들과 문헌에 나타나는 기록으로 미루어 충분히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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