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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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향기 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현향기
미실이라는 여인을 처음 만난 건 ‘현향기’라는 소설이었다. 그 소설에서는 주인공의 동생 사다함의 정인이라는 아주 조그만 역할로 나왔지만, 그녀는 단 한 번의 몸짓과 단 한 마디의 말로 나를 매료시켰고 내 머릿속에 각인되었다.
“후회하거나 뒤돌아보기엔 너무 멀리 왔군요. 우린 선택을 한 거지요. 나는 권력을, 당신은 사랑을, 누구의 선택이 옳았는지는 후손들이 판단해 주겠지만… 사로부 당신이 필부(匹夫)로 잊혀질 때 나는 만고에 다시없을 권력자로 청사에 길이 남을 것입니다.”
어쩐지 슬프게 느껴지는 대사였다. 태어날 때부터 왕에게 색공을 바치기 위해 태어난 대원신통이란 신분 때문에 그녀는 ‘사랑’이라는 것을 잘 알지 못했을 것이다. 대원신통 계급으로서 운명에 순응하는 여인에 불과했다. 미실에게 있어 색사는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저 해야만 하는 일이었던 것이다. 이제까지 배워온 방중술을 펼치는 장(場)일뿐 그리고 태어날 때부터 받아들여야만했던 자신의 의무일 뿐이었다. 어딘가가 허했던 그녀의 마음은 지소태후에 의해 궁에서 쫓겨나면서 더욱 허해지게 된다. 아끼던 말을 타고 달리다가 늪에 빠져 말과 헤어지게 되던 날, 그녀는 生이란 것에 대해 허무함까지 느끼고 만다. 그런 그녀의 앞에 두려움에 바들바들 떨고 있는 망아지와 함께 한 소년이 나타나는데, 그가 바로 사다함이었다. 사다함을 만나고 미실은 처음을 ‘행복’과 ‘소소한 기쁨’ 그리고 ‘사랑’을 느끼게 된다. 상대방을 위해 방중술을 펼치기만 하는 색사가 아닌 둘이 함께인, 둘이 함께이기에 마음이 가득차지는 색사를 알게 된다.
“왜 사람이 미후()의 족속들과 달리 서로를 마주 보는 형태로 사랑을 나누는지 알았어요.”
미실은 가쁜 숨을 헐떡거리며 말했다. 사다함의 손과 입술이 닿는 곳마다 불쑥불쑥 붉은 꽃이 피고 있었다. 꽃은 뜨거웠다. 불에 타 델 듯 아슬아슬했다.
“당신의 얼굴이 보고 싶어요. 당신이 내 몸에 꽃을 피울 때 당신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궁금해요. 궁금해 미치겠어요. 정말 다행이에요. 마주 보기에 내 손은 자유롭게 당신의 얼굴을 끌어당겨 입 맞출 수 있지요. 댕돌같이 단단한 당신의 가슴을 더듬어 확인할 수 있지요. 당신, 정말 거기 있는 거죠?”
미실은 작은 새가 지저귀듯 사다함의 귓가에 미어(美語)를 속삭이었다. 그렇게 말하지 않으면, 표현하여 드러내지 않으면 가슴이 벅차 터질 것만 같았다. 하늘과 땅, 추위와 더위, 낮과 밤, 짝을 지어 대립하고 융화하는 모든 것처럼 미실은 사다함을 갈구하고 있었다.
미실은 사다함에 대한 사랑으로 새롭게 눈을 뜨게 된다. 음과 양은 오목하고 볼록하여 들어맞는 이치가 교묘하여, 남자와 여자는 존경으로도, 믿음으로도, 감사의 표시로도, 미안함의 토로로도, 용서로도, 사과로도, 심지어 미움이나 증오, 복수로도 색사를 나눌 수 있다. 하지만 몸과 마음의 높이가 층이 지지 않게 마주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사랑으로 함께할 때만 가능하다는 것, 사랑만이 가장 지극한 환희로 완성해낼 수 있다는 것, 불완전에 익숙하고서야 쉽게 상상할 수 없는 인간이 지어낼 수 있는 유일무이한 완전함의 경지…. 이제껏 배워온 방중술로는 알 수 없는 것들을 미실은 사다함과 함께함으로써 알게 된 것이다. 사다함은 미실을 죽였다. 진정한 사랑은 지나온 과거와 기억을 죽였다. 슬픈 것에서부터 기쁜 것까지, 나쁜 것뿐만 아니라 좋은 것마저도 마땅히 죽어 묻혔다. 하지만 그 과거와 기억에 미련은 없었다. 흔히들 말하는 사랑하면 유치해진다는 그 말조차 미실에게는 소용이 없을 것이다. 태어나 처음 느낀 사랑 앞에서 미실은 순진무구한 어린 소녀이면서 세상의 풍파를 모두 겪은 노파였던 것이다.
미실이 사랑에 빠져 한 없이 솔직해지고 행복해할 때, 미실의 외할머니인 옥진은 미실이 걱정스럽고 불안했고, 미실이 사다함과 사랑에 빠져 활짝 피어있는 모습을 보며 본능과 예감이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숙명은 거역할 수 없는 것이라고, 타고난 운명을 거부하다가는 더 큰 상처를 입을 뿐이라고. 너무도 아끼는 손녀이기에 보고만 있을 수 없었고, 나지막하게 미실을 꾸짖지만 미실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사랑에 눈이 먼 사람에게 발밑의 벼랑을 보라고 말하는 것이 어리석었던 것이다. 미실은 오히려 당당히 사랑을 선언하지만, 돌아서서 나오는 길에는 미실의 마음마저도 편치 않았다. 옥진이 무슨 연유로 자신의 사랑을 가로막는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태어나기 이전부터 정해졌던 것들, 세상에 나고 자라면서 한 번도 의심해 보지 않았던 가치를 부정하고 거부하는 것은 미실에게도 두렵고 낯선 일이었던 것이다. 가문의 내력을 배반하고 할머니의 가르침을 거스르는 일도 힘들고 고통스러울 테지만, 상상하고 믿을 수조차 없었던 것이다. 사다함이 없는 세상을, 사다함을 잃은 자신을, 사다함 없이 살아가는 시간을 아무리 떠올려 보려 해도 할 수가 없는… 그게 사다함을 사랑하는 미실인 것이다.
하지만, ‘운명’이란 것은 곧 다가왔다. 사다함은 가야국과의 전쟁에 출정을 하게 되었고, 미실은 돌아오리라는 굳은 믿음만 가지고 사다함이 출정을 가는 날 사다함을 만나러 가지만 만나지 못하고 돌아서면서 미실은 밤새 뜬 눈으로 지새우면 지은 시나위 한 자락을 바람결에 실어 날렸다.
바람이 분다고 하되 임 앞에 불지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