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감 - 민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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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감 - 민촌 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민촌
가난은 무엇으로 극복할 수 있을까? 소설「민촌」을 읽고 난 뒤, 가장 먼저 떠오른 질문이 바로 이것이다. 무엇이 나에게 영향을 미쳤는가는 알 수 없지만, 언제부턴가 나는 가난이란 개인의 노력만 있다면 당연히 극복할 수 있는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소설 「민촌」을 읽고 난 뒤, 나는 이러한 내 믿음이 옳은 것인지에 대한 의심이 생겼다. 정말 가난은 개인의 노력만으로 극복할 수 있는가 하고 말이다.
「민촌」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부분 일반 민중들이다. 1920년대 민중들의 삶이 어떠했을지는 관심조차 없던 나였기에 작품 속에서 보여주는 이들의 삶은 내겐 꿈같은 이야기였다. 깨고 나면 등이 흠뻑 젖어있는 악몽 같은 이야기처럼 말이다. 가난으로 인해 사랑과 가족, 그리고 자신의 행복한 삶을 모두 잃어버린 사람들, 그들에겐 더 이상 꿈도 희망도 없는 슬프고 비참한 삶만이 남은 듯 했다.
「민촌」에 등장하는 인물들 중 대부분은 지주의 땅을 소작하여 먹고 사는 소작민이다. 그 해에 그들은 흉년을 맞았다. 흉년이든 풍년이든 사람은 먹어야 산다. 흉년으로 먹고 살길이 막막해진 소작민들과 그나마 소작도 못한 이들은, 먹고 살기위해 모두 나무장수와 짚신장수를 하기도 하고 화전을 하기도 했다. 이러한 노력에도 그들은 하루하루가 막막한 신세를 벗어나지 못한다. 위에서 언급했던 것과 같이 가난이 개인의 노력만으로도 벗어날 수 있는 것이라면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부자는 아니더라도, 먹고 사는 데는 걱정이 없어야 한다. 그런데도 그들은 왜 이리도 궁핍한 삶을 벗어나지 못하는 걸까? 이들의 갖은 노력에도 가난은 쉽게 이들을 놓아주지 않는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 중 점순이는 이러한 가난에 결국 무너지고 마는 인물 중 하나이다. 흉년은 그녀의 집만 비켜가지 않았다. 모두가 흉년으로 고생하던 그 해에 점순이네 역시 흉년을 맞이한 것이다. 흉년으로 인한 가난은 그녀의 사랑마저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자신을 가난에서 구해줄 유일한 탈출구인 박주사의 첩이 되고 만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 돈이 행복순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돈은 그 사람의 행복을 유지하는 밑거름이 된다. 점순이에게 당장 굶어죽지 않을 만큼의 돈만 있었더라면 그녀는 양반댁과 행복한 사랑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돈이 없는 사랑, 사랑이 없는 돈. 결국 현실은 사랑은 없어도 돈은 있어야 한다.
그녀의 안타까운 처지를 알고 마을 사람들은 조금씩 점순이네 집을 도와주었다. 오빠 점동 역시 동생이 안타까운 삶을 선택하지 않도록 더욱 노력한다. 그러나 점순이의 집은 조금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점점 더 악화될 뿐이다. 개인의 노력뿐만 아니라 소수의 노력이 더해졌는데도 불구하고 어째서 그들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은 것일까? 그들이 어려운 형편에 겨우겨우 모은 마음들은 박주사의 응큼한 속셈에서 나온 푼돈 얼마보다 힘이 없었다. 안타까웠다. 그들의 노력이 박주사가 내미는 검은 손보다 더 힘차게 점순이네를 일으켜 세워주길 바랬는데, 그럴 수 없었다는 게 너무 안타까웠다. 또 가난은 정말 개인의 노력으로도, 순수한 소수의 사람의 마음으로도 떨쳐낼 수 없는 것인가 하는 생각에 더 안타까웠다.
가난을 극복하는 문제에 대해 이 작품 속에서 해결방안을 지닌 한 인물이 있다. 바로 점순이가 사랑한 양반댁이라는 인물이다. 그는 서울에서 내려와 마을 사람들에게 양반의 대우를 받지만 자신이 양반이라고 불리는 것을 꺼려한다. 또 그는 마을 사람들에게 자본주의의 부조리에 대해 이야기하여 가난을 자신의 죄라고 여기며 사는 사람들의 생각을 조금씩 깨우쳐주는 인물이다. 점순이와 점동이, 순영이 역시 양반댁에 의해 자본주의의 부조리를 깨닫고 이 모진 세상에 태어난 자신들이 슬퍼 눈물을 흘리게 된다. 그렇다면 이렇게 불평등한 세상에 대한 양반댁의 해결방안은 무엇일까? 양반댁은 사람들이 모두 함께 일하고, 잘 먹고 적당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세상이 와야 한다고 언급한다. 모두가 함께 일하고, 함께 먹고, 함께 교육받는 세상, 이는 양반댁이 사회주의를 지향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양반댁은 자본주의의 부조리를 해결하는 방안으로 바로 사회주의를 내세우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생각이 들었다. 이 작품 속에서 작가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인물이 바로 양반댁이라고 말이다. 작품 곳곳에서 자본주의의 부조리에 대해 작가는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양반댁의 생각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옳다! 지금 이 세상에서는 물론 이런 사람을 잘났다 하겠지. 남을 잘 속여서 제 낭탁을 하는 사람을 똑똑하다고 칭찬하지 않던가? (p 143)
작가는 작품 속에서 박주사와 부유층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지니고 있는데 이러한 부유층의 횡포를 비판하고, 빈곤층의 비참한 삶을 보여줌으로써 자본주의의 부조리를 지적하고, 이러한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사회구조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작가의 생각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양반댁의 또 다른 특징으로는 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 중 가장 근대적인 사고방식을 지닌 인물이라는 것이다. 양반댁과 점순이와의 대화에서 양반댁은
하기는 같은 사람으로 누구는 양반이니 누구는 상놈이니 하고 또 누구는 잘살고 누구는 못사는 것이 벌써 못생긴 인간이다. 그렇다면 너하고 나하고 같이 노는 것이 어떨 것 무엇 있니? 다 같은 사람인데. (p 128)
라고 말한다. 1920년대에는 이미 양반과 상놈의 구분이 없어진 시대라고는 하나 아직 사람들의 사고에는 근대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시기라고 한다. 이 점은 작품 속에서도 살펴볼 수 있는데 박주사는 자신은 양반이라고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에게도 거침없이 ‘하소’체를 사용하기도 하고, 마을 사람들은 자신들보다 나이가 어린 박주사와 양반댁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하며, 존칭을 사용하는 등의 태도를 보인다. 이는 작품 속 인물 대부분은 아직도 계층의식을 지녔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러나 양반댁은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스스로 양반이라 불리기를 꺼려하며, 양반, 상놈과 같은 구분을 부정하고 있다. 따라서 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가장 근대적인 사고방식을 지닌 인물이라고 하겠다.
양반댁과 대조되는 인물로써 박주사를 들 수 있다. 양반댁은 자본주의에 대해 부정하고 사회주의를 지향함으로써 모두가 함께 일하고 교육받으며 살 수 있는 세상을 꿈꾸지만 박주사는 이 작품 안에서 가장 자본주의를 풍요롭게 누리는 인물이다. 그는 돈으로 원하는 여자는 자신의 첩으로 들이고, 또 그 실증을 느끼면 그 첩을 버리고 다른 첩을 들이기도 한다. 그의 집안은 친일행각을 통해 부를 축적해 가지만 돈이 많다는 이유로 동네사람들은 모두 박주사에게 허리를 굽힌다. 여기서 박주사는 자본주의에서 나타나는 부조리를 대표하는 인물이라고 생각된다. 그는 돈을 조건으로 자신을 사랑하지도 않는 점순이를 첩으로 들이며, 점순이의 아버지가 곧 병으로 죽게 될 것으로 판단되자, 3년 상을 치fms다는 등의 핑계로 점순이가 첩으로 들어가는 것을 미룰까봐 먼저 가마를 보내는 등, 자신의 잇속만을 채우는 태도를 보여준다. 이는 돈이면 뭐든지 다된다는 점과 개인의 이익만 차리는 자본주의의 부조리함을 나타내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이 소설과 같은 시기에 동일한 소재로 출간된 작품이 있는데 바로 최학송의 「홍염」이다. 이기영의「민촌」과 최학송의 「홍염」은 가난을 소재로 하여 민중들의 빈곤한 삶을 묘사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으나 가난으로 억압받는 사회에 대한 민중들의 태도에서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다.
이기영의「민촌」에서의 민중들은 교육받은 인물들은 아니지만 양반댁에 의해 자본주의의 부조리에 대해 조금씩 깨닫게 된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한 사회구조에 대한 저항의식이 조금도 드러나지 않는다.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양반댁에 의해 잘못된 세상을 깨달은 순영, 점순, 점동 역시 자본주의의 부조리, 그 자체인 박주사에게 조금의 저항도 하지 못한 체 순응하고 만다. 마을 사람들 역시 박주사의 횡포에 분노를 느껴 점순이네를 도와주지만, 박주사에 대한 저항적인 태도는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최학송의 「홍염」에 나오는 문서방은 자본주의의 부조리를 깨닫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 부조리함을 몸소 체험함으로써 분노하게 되지만, 인가(중국인 지주)의 집을 불태우고 인가를 죽임으로써 자신의 분노를 표출하는 저항적인 태도를 보인다. 또 「홍염」은 이기영의「민촌」에서 가난을 사회구조적 문제로 보는 것과 다르게 가난에 대한 문제점이 어디에서 오고 어떻게 해결해야하는가에 따른 해결방안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 채 단지 한 개인이 가난으로 인해 겪는 비극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점이 있다.
나는 이기영의 「민촌」을 읽으면서 가난에 대해 참 많이 생각해 보았다. 언제부터 인간에게는 가난이 생겨난 것이며, 가난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에는 무엇이 있을까 하고 말이다. 이는 이 작품을 쓰면서 했을 작가의 고민이 나에게 그대로 전해졌기 때문이다.
이 소설이 발표된 지 80여년이 지났다. 사회주의 역시 가난한 사람들에게 평등한 교육과 충분한 음식을 제공해 줄 수 없다는 걸 이 소설을 쓴 작가가 보았다면 어떠한 반응을 보일까? 만약 「민촌」을 쓴 이기영이 살아 돌아온다면 물어보고 싶다. 사회주의도 실패한 지금, 이젠 무엇이 이 가난을 구할 수 있겠느냐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