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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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괴물
칙칙한 회색의 표지에 붉은 색으로 ‘괴물’이라 적혀있었다. 그것으로 하여금 독자의 읽고 싶은 충동을 억제시키는 효과가 있다고 할 정도로 참으로 멋없는 표지였다. 그래. 이외수란 이름 세 글자만 보고 읽어보자. 그것이 괴물을 읽게 된 시작이었다. 이외수는 역시 이외수였다. 그의 괴물 같은 상상력과 글 솜씨에 빠져들었다. 다양한 역사상식과 문화상식, 종교상식, 사회상식들은 두 권의 책으로 인해 새로운 세상을 경험할 수 있도록 해줬다.
엽기적인 연쇄살인사건을 주제로 삼고 우리나라에서는 진저리 치는 전생을 물고 늘어져 불교라는 종교로 매듭을 짓고 있다. 각 장별로 화자 및 시점을 달리하여 소설 읽기의 새로운 맛을 제시했다. 주요하게 다루어지는 등장인물이 다른 작가의 소설에 비해 많고, 그들이 이제까지 걸어온 길을 설화적 기법으로 표현하여 전기적(傳奇的)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우리의 인생이 잇따른 인연으로 이루어져 있듯이, 이 소설 역시 앞부분과 뒷부분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서로 연계되어 있기 때문에 수많은 등장인물에도 불구하고 이유 없이 거론된 인물은 하나도 없다. 등장인물 중 이 소설의 주인공이 딱히 누구라고 정의하기 힘든 것도 사실이다. 읽는 사람의 취향에 따라 주인공을 골라 봐도 된다. 그리고 주인공이 누구냐에 따라 소설의 해석이 달라지기 때문에 또 다른 읽는 맛이 생긴다. 나는 소설의 도입부부터 나오고 전체적인 주제를 앞세운 전진철이 아닌 ‘성기태’를 주인공이라 생각하고 읽었다.
(괴물1 p.175) 정신적인 부자가 되고 싶으면 하나님을 믿어야 하겠지만 물질적인 부자가 되고 싶으면 돈을 믿어야 한다. 하나님은 머나먼 천상에 존재하지만 돈은 가까운 지상에 존재한다. 자연을 움직이는 존재는 하나님일지 몰라도 인간을 움직이는 존재는 돈이다. 적어도 성기태의 인명사전에는 예수나 부처가 실패자들로 기록될 수밖에 없다. 그토록 많은 먹잇감들을 확보하고도 정작 자신들은 땡전 한 푼 챙기지 못한 채 불행한 삶을 마감했기 때문이다. 이제 지상에서는 돈을 많이 버는 인간이 우상으로 대접받는 풍조가 만연해 있다. 축구선수도 우상으로 대접받고 있으며 야구선수도 우상으로 대접받고 있다. 대중가수도 우상으로 대접받고 있으며 영화배우도 우상으로 대접받고 있다. 심지어는 고관대작들의 집만 전문으로 터는 도둑까지 우상으로 대접받고 있다. 성기태는 자신도 언젠가는 우상으로 대접받는 날이 오리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다.
흔히들 말하는 사기꾼을 직업으로 삼고 있는 성기태는 상대방에게 쉽게 다가감과 함께 상대방에게 감언이설을 던지며 자신의 먹잇감으로 만들고는 한다. 채플린과 포플린을 구분 못하는 세대들은 성기태의 먹잇감으로는 딱 이었다. 수차례에 걸쳐 거액을 제공해 주었고 수차례에 걸쳐 정사장면도 제공해 주었다. 성기태의 직업에서는 정사장면은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요소이다. 미추를 막론하고 정사정면은 골치 아픈 문제가 발생했을 때 여성들의 입막음을 하는 부적으로는 최상급이다. 막판에는 당사자에게 테이프를 직접 팔아먹을 수도 있으니 번식기간이 아니면 성적충동을 느끼지 못하는 동물이 아닌 인간의 특수체질을 잘 사용한 예이기도 한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끊임없이 돈을 갈구하고 돈이면 모든 것이 되리라고 생각하는 성기태가 안타까웠지만 그의 돈에 대한 개념은 높이 샀다. 잘못된길을 걸으면서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그의 모습에 타락하지 않고 순수한 열정으로 열심히 살아갔다면 힘들더라도 자신의 열정을 좀 더 믿고 좋아했다면 그는 그가 그렇게 바라던 신춘문예에 당선되지 않았을까 싶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성적충동을 느끼기 마련이다. 그 성적충동이 정말 성스럽고 아름답게 표출되느냐와 아니냐에 따라서 사람들의 시각도 달라지기 마련이다. 정사장면과 관련된 부분을 읽다보면 언젠가는 우상으로 대접받기 바라던 그의 마음이 진심인가 싶기도 하였다. 하지만 금전적인 부분에서는 종교를 막론하고 하나님과 부처를 실패자로 기록한 그에게 공감했다. 물질만능주의사회에 살고 있는 내가 유난히 공감을 많이 할 수 밖에 없는 부분이었다. (지금 내가 돈에 민감한 부분도 없지 않아 있지만 말이다.) 돈이 없기 때문에 자신의 꿈, 사랑, 사람들을 잃어버린 성기태의 상황이 꼭 되어보지 않아도 돈을 최고로 생각하는 그를 이해 못하는 사람들은 없을 것 같다. 지금 우리 모두가 물질만능주의사회에 살고 있으니까.
다들 대학생이면 초급사회인이라고 한다. 사회인은 현실을 마주하고 현실을 그려낸 멀티미디어들을 접해야 진짜 사회에 나갔을 때 별도의 사회적응시간이 다른 사람들보다 많이 들지 않을 것이다. 2권을 읽기가 겁이 났었다. 2권을 읽기 전에 현실을 마주보고 서야할 느낌이 들었다. 부패하고 있는 세상을 그려내고 있는 책을 한권으로 부족하지만 그 한권마저도 읽을 용기가 안 났었다. 이미 사회는 능력으로는 올라갈 수 없는 사회가 되어 버렸다. 남들도 모두 사기치고 잘 사는 세상, 차라리 함께 사기 치는 것이 낫다고 생각 해버리는 것은 모두 쓰레기를 버리는데 나만 버리지 않는다고 해서 환경이 오염이 방지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누가 굶어 죽느니 자살해라고 쉽게 권할 수 있을까. 이 책은 그런 사회를 극도로 나타내보였다. 아니 지금도 충분히 그런 세상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괴물1 p.176~177) 한때는 성기태에게도 성실과 인내를 표방하고 법률과 질서를 존중하던 시절이 있었다. 정신의 빈곤을 등한시하고 물질의 풍요만을 갈구하는 자들을 냉소하던 시절도 있었고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고 자신의 쾌락만을 추구하는 자들을 혐오하던 시절도 있었다. 그는 날마다 희망이라는 이름의 인력거를 끌고 성공이라는 이름의 종착역을 향해 내달려가던 젊은이였다. …(중략)… 대학을 졸업하기 바쁘게 이상을 내팽겨 쳐버리고 현실에 투항해 버린 친구들을 만나면 적개심까지 느끼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가난한 자들에게는 세상이 온통 자갈밭 투성이였다. 아무리 이상이라는 인력거를 끌고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희망이라는 도로를 내달려보아도 성공이라는 이름의 종착역은 보이지 않았다. 어디를 가도 절망이라는 이름의 간이역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끌고 다니던 희망이라는 이름의 인력거는 서른 고개를 넘어서기가 바쁘게 손잡이가 부러져버리고 바퀴가 찌그러져버렸다.
찌그러져버렸다. 그의 꿈과 이상이. 자신의 꿈과 이상이 찌그러져버렸을 때의 감정은 당사자가 아니면 알 수가 없다. 눈앞이 캄캄해져옴과 동시에 주저앉아 일어날 힘도 없을 것이다. 그 처럼 좋은 시나리오로 성공할 수도 있는 사람이 한 번의 실패 때문에 자기 스스로 인생을 망치는 골짜기로 떨어지는 경우가 있을 수도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사람이 어떤 골짜기로 떨어졌든 떨어져 버린 건 그 사람이다. 물론 주위 사람들도 당사자처럼 매우 가슴 아팠겠지만, 그 상황에서는 당사자의 마음가짐이 매우 중요하게 작용한다고 생각한다. 더욱이 자기비하를 별로 안 좋아하는 나로 써는 자신을 패배자라고 생각한 성기태에게 매우 화가 난다. 자신이 골짜기에 떨어져도 괜찮아 더 높게 뛰기 위해 웅크린 것뿐이야. 라고 자신을 위로하며 더 마음을 굳게 먹었다면 그의 시나리오는 삼류가 되지 않고 일류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이 든다. 자신을 믿는 마음에서 모든 것에 대한 성공률 50%정도는 생각한다. 즉 시련과 마주해도 사람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세에 따라 미래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거 같다. ‘괴물’을 읽다보면 남들이 천하게 여기는 백정 윤현부가 등장한다. 그는 백정이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지만 자신이 죽인 동물의 혼을 위해 천불전을 만들기로 결심한다. 윤현부처럼 성기태도 자신의 욕심을 위한 도전이 아닌 자신의 행동을 먼저 돌아보며 글을 썼다면 더 나은 글을 쓰고 그가 그토록 바라던 신춘문예에도 당선되지 않았을까 싶다. 나도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 허나 내 욕심을 채우기 위한 글은 쓰지 않을 것이다. 신춘문예, 잡지에 당당히 새겨져있는 내 글, 내 이름으로 된 책 한권이 탐나지 않을 리가 없다. 백절불굴이라는 말처럼 백번을 쓰러져도 꺾이지 않을 열정이 있다면 탐나는 것을 포기하려는 마음은 생기지 않을 것 같다. 삼십년 이상을 살아온 성기태와 이제 이십년이 겨우 넘은 내가 성기태를 아니꼽게 바라보는 것에 대해 혀를 끌끌 찰 사람도 있을 것이다. 물론 사회를 나보다 더 많이 경험했을 성기태지만 나는 결과는 노력을 배신하지 않는다는 말을 믿는 사람이다. 시련의 골짜기가 얼마나 깊었든 열정을 다해 그 꿈을 향한 이상을 멈추지 않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멈추지 않는다.
또, 부가적인 요소를 보자면 더 깊은 시련의 골짜기로 떨어지게 하는 것도 주위 사람들의 말이요 골짜기에서도 구제하는 것도 주위 사람들의 말이라고 생각한다. 그에게 힘내라고 조금만 더 달려보자고 말하는 사람이 있었더라면 그는 그렇게 되었을까? 그의 동거녀는 그의 신춘문예 탈락에 도망가 버린다. 그에게는 희망이 없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하면서 지금까지 버텨왔을 힘든 시간들을 예상 못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성기태에게 자신이 많은 도움이 되고 힘이 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마지막까지 그를 잡아 주지 못한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 더 크다.
살구꽃이 잔인하게 아름다운 봄날. 억울하게 누명을 쓴 사내가 눈앞에 진범을 두고 누명을 쓰고 한쪽 눈엔 화살이 꽂힌 채 죽임을 당한다. 전생에 그 사내에게 화살을 쏘았던 궁사가 이생에 ‘성기태’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사내의 복수극이 찬란하게 쓰여 있는 이 글들은 어쩌면 전생에 궁사라는 이름을 가지고 집행관의 졸개이자 사내에게 활을 쏘았던 성기태의 전생과 이생의 삶을 쓴 글들이라고 느껴졌다. 다른 독자들은 주인공을 전진철이라고 했지만 나에게 주인공은 성기태였다.
성기태를 비난하였지만 그에게 글을 쓰려는 사람으로써의 동질감과 시련의 골짜기에 빠져 올라오지 못한 동정심이 느껴진다. 7번이나 신춘문예에 도전했던 그를 보며 한 번에 쓰러지지 않음을 약속하고 삐뚤어져버린 그를 보며 비록 소설 속 인물이지만 나는 그러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