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신라의 신분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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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역사]신라의 신분제도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1. 골품제(骨品制)의 성립

2. 골품제의 신분구조
(1) 성골
(2) 진골
(3) 두품 신분

3. 골품제도의 사회적 제약
(1) 골품과 관등(官等)의 규제
(2) 골품과 생활양식

4. 골품제도의 해체와 소멸
본문내용
신라의 골품제도는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난 제도가 아니라, 신라의 국가 형성 과정에서 만들어진 신분제를 바탕으로 법흥왕(法興王) 때에 율령을 반포하면서 편성한 신분제였다. 골품제는 크게 왕족을 대상으로 하는 골(骨)신분과 일반 민(民)을 대상으로 하는 두품(頭品)신분으로 나누어진다.
'골' 신분은 사로국(斯盧國)을 형성한 혁거세의 후손인 박씨족 중 일부와 13대 미추왕(味鄒王), 17대 내물왕(內物王)과 그 이후의 왕들을 배출한 알지의 후손인 김씨족 중 일부 세력들이 가졌던 신분이다. 520년(법흥왕 7) 율령을 반포할 때 성골(聖骨)과 진골(眞骨)의 '골'신분이 편성되었는데, 왕과 그 형제의 가족들은 성골이 되었고, 박씨와 김씨 중 내물왕의 후손 중 일부 세력들은 진골이 되었다.
골 계층이 아닌 두품 계층의 형성은 신라의 성립과 긴밀한 연관이 있다. 신라는 사로 6촌(村)이 통합하면서 형성된 서라벌(徐羅伐)을 기반으로 두고 주변의 소국들을 병합하면서 신라왕국의 수도가 되었다. 사로국이 형성되기 이전에 존재하였던 사로 6촌의 각 촌은 신라의 성장에 따라 왕경의 지방행정구역으로 편제되었다. 6촌은 6부(部)가 되었고 6부는 다시 '리(里)'라는 하급 지방행정구역으로 나누어 졌으며, '리'는 다시 몇 개의 마을로 나뉘었다. 각 행정구역에는 각각의 지방 세력들이 있었다. 그 세력들 중 6부의 부장을 배출하는 세력들이 6두품이 되었고, 리에서 이장을 배출하는 세력들이 5두품이 되었다. 마을에도 마을의 장(長)을 배출하는 세력은 4두품이 되었다. 그리고 부장, 리장, 마을의 장들은 각기 독자적인 마을을 직할지로 가지고 살았다. 그 결과, 부장의 직할지에 살던 일반민들은 3두품, 리장의 직할지에 살던 일반민들은 2두품, 마을의 일반민들은 1두품이 되었다. 그러나 3두품·2두품·1두품은 그 존재 형태가 같았기 때문에, 평인(平人) 또는 백성신분으로 통합되었다.


참고문헌
, 동국대학교 신라문화 연구소 작, 경상북도, 1987.
, 이종욱 지음, 일조각, 1999.
, 하일식 (외) 지음, 아카넷, 2000.
, 이종욱 지음, 김영사, 2000.
하고 싶은 말
성심성의껏 작성한 보고서입니다. 아무쪼록 많은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