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절 -1
 2  절 -2
 3  절 -3
 4  절 -4
 5  절 -5
※ 미리보기 이미지는 최대 20페이지까지만 지원합니다.
  • 분야
  • 등록일
  • 페이지/형식
  • 구매가격
  • 적립금
자료 다운로드  네이버 로그인
소개글
절 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1. 별을 보며 걷기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그리고 별빛이 그 길을 훤히 밝혀 주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중략)…다시 말해서, 세계와 자아, 천공의 불빛과 내면의 불빛도 서로 뚜렷이 구분되지만 서로에 대해 결코 낯설어지는 법이 없다. 게오르그 루카치 저, 반성완 역, 『루카치 소설의 이론』, 심설당, 1985, p25.
루카치는 왜 그리스 시대가 행복했다고 말한 걸까? 바로 자아와 세계가 조화를 이룬 시대였기 때문이리라.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자각하며 생동하는 자연의 이치를 알고 그 질서 속에서 순응하며 자연의 일부로 살아가던 상태. 그때는 길의 지도가 별도로 필요하지 않았다. 하늘의 별을 가슴속 깊이 품고 걸어갔으면 됐으니까. 하지만 지금의 시대는 달라졌다. 나 혹은 우리들만 잘 살면 된다는 생각을 진리로 두고 오로지 ‘돈’을 보며 걸어간다. 그러기 위해선 삶의 방향과 방식이 적힌 ‘지도’도 수정할 수밖에 없다. 효율성에 기반을 둔 지름길이 최우선이다. 어떤 경쟁에서도 도태되면 안 된다. 이것이 자본의 논리이고 이를 바탕으로 생각하고 행동한다. 사라진 별의 시대를 그리워하는 이들이 있다. 그들이 몸담고 있던 별의 시대란 정의와 대의명분이 있는 무림세계, 즉 강호이다. 이제 그 강호는 사라졌고 동시에 그들이 추구하는 질서나 정의도 존재가치를 상실했다. 오직 법과 자본으로 상징되는 견고한 문명의 질서만이 그 자리를 대신할 뿐이다. 변화된 세계에서 “무학의 늙은이”로 살아가는 강호의 무림 고수들이 다시 만나게 된 세계는 어떤 모습일까.
2. 눈이 흩//나리는 세계에서
교도소를 출감한 대천권왕 김일해에게 바깥의 세계는 전과는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다. 상공을 가로지르는 비행기를 으로 쉽게 통제해버리는 견고한 ‘법’이 벽처럼 존재하는 세계. 권왕이 보는 세계는 기형적이다. 그래서 더 이상 자연스러운 순환이나 평화가 느껴지지 않는다. 때문에 눈이 연속적으로 ‘흩나리지’ 못하고 “흩//나”리는 것이고, 모든 상황이 “끊어”져 보인다. 무림의 대의명분이 파괴된 공간에서 그의 모습은 더욱 왜소해진다. 그가 국가의 법률시스템이 철저하게 구축되어 있는 교도소에서 나오는 장면은 이를 더욱 극명하게 보여주는 부분이다. 근대가 진행될수록 가장 예리하고 그물망처럼 촘촘하게 형성된 것이 있다면 바로 ‘법’의 체계가 아닐까. 법이야말로 대중들을 가장 쉽고 효과적으로 신속하게 통제할 수 있는 수단이었으리라. 많은 법적조항들이 현대사회에 정립되어 있다는 건 우연이 아니다. 법 앞에서 인간은 평등한 게 아니라 단지 점점 흐려질 뿐이다. 그러니까 국가가 판결한 형기를 치루는 행위는 사회에서 한 인간의 존재 기반이 사라지게 되는 상징적인 의식(儀式)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권왕은 살아 있어도 “이미 죽은 인물”이 된다. 권왕이 교도소에 들어간 이유는 아주 사소(?)하다. 어느 날 건달과 시비가 붙었다. 그리고 수많은 건달들을 아주 쉽게 제압한다. 권왕이 볼 때, 건달들은 “밟으면 죽는 여치 떼처럼 허약하고 미미한 상대들”이었다. 싸울 만한 상대가 없다는 걸 깨닫고는 그는 문뜩 외로워진다. 때문에 이 세계를 인정해주지 않으면 안 되었다. 대의가 사라진 세계에 ‘법’이 있었고, 그는 지쳐버렸다. 법 앞에서 그는 속수무책 작아질 수밖에 없다. 그에게 법이란 너무도 낯선 것이며 상대하기에 거대한 것이었다.
권왕의 출소로 인해 왕년의 영웅들이 뭉치게 된다. 청룡검제 최일우, 운무천마 선우진, 그리고 무림 고수는 아니지만 한때 운동권의 영웅이었던 경천대법 이장록이 그들이다. 그러나 뭉친 그들은 더 이상 용의 모습이 아니다. 대의와 명분이 사라진 세계에서 단지 “연명”만 하는 네 마리의 작은 위타(委蛇), 미꾸라지로 전락했다. 그들은 어느새 개인으로 전락해버린 “스스로를 발견”한 외로운 존재들이다. 싸우고 싶어도 싸울 수 없고, 자신이 믿고 추구했던 것들이 사라지고 변질된다면 누구라고 외로워하리라. 할 수 있는 거라곤 소녀들의 시대에 유행하는 노래를 듣거나 “그리운 시절”을 떠올리는 것뿐이다. 이제 그들은 ‘六 인승’ 승합차를 타고 빙해천수 조인덕이 있는 곳으로 향한다.
3. 무언의 세계에서 수다의 세계로
두 고수의 합에는 어떤 말도 필요치 않았다. 무선의 권은 바람을 거스르지 않았고 권왕의 권은 대지를 억누르지 아니했다. (p216)
약 백 년 전 한때는 “전설이었고…신이었”던 권왕은, 만주에서 학익무선 사마천과 무공을 겨룬 날을 회상한다. 둘의 대결에서는 요란한 소란함이 없었다.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고요할 뿐, 수다스런 말도 필요 없는 그들만의 시간을 누렸다. 분명 둘은 싸웠지만 폭력을 찾아볼 수 없었다. 과연 야만과 파괴가 없는 온전한 “합合”이었다. 승패도 중요치 않았다. 단지 그날의 일이 시구로만 남아 세인들의 입을 통해 전해질 뿐이다. “밤새 그의 권은 한 포기의 보리도 해하지 않았거늘, 나의 권은 그만 두 포기의 보리를 꺾고 말았네.” 분명 강호의 세계는 詩가 존재했다. 이것은 평화의 시대를 떠올린다. 물론 무림지존이 되기 위해 상대를 제압하고 이기고 누르려는 강호의 논리가 있다. 하지만 거기에도 그들만의 도道가 있는 법. 대의와 명분이 있기에 그들의 대결은 파괴적이지 않고 자연과 속인에게 나쁜 영향을 주지 않는다. 시가 곧 법이 되고, 진리가 되고, 삶의 등대가 되는 시대. 루카치가 말한 호메로스의 서사시가 존재하는 그때의 그리스 시대와 겹쳐진다. “고대의 영웅들은 집합적인 개인이었다. 오디세우스나 솔로몬 같은 개인은 개인이 곧 민족이고 민족이 곧 개인인 진정한 영웅이었다.” 김유동, 『아도르노와 현대 사상』, 문학과지성사, 1997, p71.
권왕은 자신의 힘을 남용하지 않는다. 모든 능력이 내 것이라는 개념이 없다. 그러한 영웅의 시절을 청룡검제, 운무천마, 정천대법도 각자의 기억 속에서 떠올린다.
그렇다면 대의와 명분이 살아 있는 강호의 세계가 파괴된 이유는 무엇인가?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전쟁이다. 전쟁으로 대변되는 문명의 폭력으로 인해 세계는 법과 돈이 지배하는 공간으로 탈바꿈한다. 여기서 전쟁은 근대 이전에 나타난 전쟁과는 차원이 다르다. “BOOM”한 폭탄 하나로 무림세계를 사라지게 할 만큼 엄청난 위력을 갖춘 것이다. “천하제일”이 바뀌는 순간이리라. 1945년 을유년 이후, 무운武運도 기울기 시작한다. 이제 강호 무림은 아주 먼 옛날이야기로 전락하고 만다. 옛날이야기의 주인공이 설 자리는 이제 없는 것이다. 그 자리는 과학적으로 환원이 가능한 것이 차지하게 된다. 그중 떳떳하게 자리를 잡고 있는 범주가 바로 ‘돈’일 것이다.
4. 다시 만난 세계와 또다시 만날 세계
그들이 현실에서 다시 일어서려면 세상을 다시 전복하거나 견고한 세상의 체제로 들어가는 두 가지 방법밖에는 없다. 세계를 전복할 수 없다면 그 세계를 그대로 인정하고 맞춰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새로운 세계에 잘 적응하는 인물이 있으니 그가 바로 ‘천마’이다. 천마는 미국을 다녀온 후 ‘미국’이 이룩해놓은 자본의 체제에 탄복한다.
대형…대의를 가져선 살 수 없는 세상이고, 대인은 어느 한 곳 설 자리가 없는 세상입니다. 대의가 없다니, 일국이 섰고 남아와 기개가 이리 들끓거늘 어찌 대의가 없을 수 있겠느냐? 아아…한숨을 쉬며 천마가 말했다. 대의가 있다면…서른두 평 아파트입지요, 혹 기개를 품은 남아라면 쉰 평 정도를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pp226~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