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분야
hwp황순원 문학 세계의 특성은 시적 서정성, 간결한 문체, 인간 존재에 대한 철학적 성찰로 집약할 수 있다. 그의 소설은 흔히 말하는 극한 상황 속에서도, 인간의 정신적 아름다움과 순수성, 존엄성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이런 점을 고려했을 때 황순원의 해방기 작품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시기 그의 작품들은 해방 전(1937~44)에 쓴 작품들과도, 한국전쟁 이후에 쓴 작품들과도 확실히 다른 세계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해방직후의 작품들은 현실에 대한 적극성과 소극성, 사실주의적 기법 사용과 우의적 기법 사용 등의 작은 차이는 있으나 기본적으로 현실인식에 기초한 날카로운 비판적 리얼리즘 소설들이라 볼 수 있다. 이 작품은 해방 이후 황순원의 첫 단편이다. 그가 아직 월남하기 전인 1945년 10월에 탈고된 것으로, 해방 직후 ‘해방’의 허구성과 민중이 처한 현실을 사실적으로 담아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해방기 황순원의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그 당시 상황을 냉철하게 조명해볼 필요가 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은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연합국의 승리와 함께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광복 이후 우리나라는 주체적인 입장 표명이 애매하게 되었고 연합국의 이해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황순원의 「술」은 이 당시, 일본 패망 직후 일본인이 경영했던 양조장을 인수하여 경영하게 된 한 한국인의 모습을 비판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즉 적산의 처리 문제와 그 인수 과정에서 볼 수 있었던 비리와 모순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동시에 일본인들이 장악하고 있던 것을 한국인이 다시 되찾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한국인들의 새로운 삶을 위해 공평히 분배되어질 수 있느냐 없느냐를 문제로 삼고 있다.
일제강점기 시대, 일본 정부를 비롯한 일본 주요 재벌들은 한반도내 대부분의 산업시설과 토지를 소유했다. 특히 동양척식주식회사 1908년 일제가 대한제국의 토지와 자원을 수탈할 목적으로 설치한 식민지 착취기관.
는 주요 금융기관과 산업시설은 물론 전체 농지의 20% 이상을 소유한 한반도내 최대의 지주로서 식민지 수탈의 온상이 되었다. 또한 한반도로 이주한 일본인들은 토지를 비롯한 각종 산업시설 등을 소유하여 경제적 지배세력으로 군림하였다. 이런 와중에 일본의 갑작스러운 항복은 한반도내 거주하고 있던 모든 일본인들에게 깊은 충격을 주었다. 그들은 재산이 어떻게 취급될 것인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 자신의 재산을 한국인들에게 처분하거나 막연히 만든 일본인 자치조직에게 위임해야만 했다. 일본 정부나 재벌이 소유한 대기업의 경우에는 해방직후 수립된 지방의 인민위원회나 보안대에 의해서 경영권이 박탈당하거나, 한국인 고용인들로 구성된 자체 경영진에 의해서 운영되었다. 그러나 미군정은 남한 내의 어떠한 임시정부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인민위원회와 보안대의 후원 하에 이루어진 주요 산업시설의 자발적인 운영과 소작농들의 임의로 실시한 토지의 몰수를 취소하였다. 결국 미군정은 1945년 9월 25일 적산 미군정에 몰수된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 소유의 농지, 주택, 기업 등의 재산을 일컫는 말로 ‘귀속재산’과도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
을 통제하기 위한 포고령 2호 남한 내 적산을 주한미군이 ‘몰수, 제한, 통제’한 후, 한국인들이 조선은행에 일정액을 예치시킴으로서 귀향하는 일본인들로부터 적산을 구매할 수 있도록 조치한 것
를 발표하였다. 하지만 이는 미군정이 독자적으로 수립한 정책이었다. 연합국 총사령부는 한반도내 적산은 미국이 단독으로 결정할 수 없는 복잡한 국제적인 문제와 결부되어 있기 때문에, 적산의 최종적인 처리는 연합국들과 협의를 거쳐 결정되어야 한다고 판단하였다.
당시 남한 내 적산 처리과정은 냉전이라는 국제관계와 강대국의 이해관계 상에서 논의되어 온 국제문제로 처리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미군정은 1948년 7월 12일 포고령 210호를 통해 일본정부에 수탈되어 적산으로 동결되어버린 재산의 해제를 발표하여 재산 반환과 함께 적산의 불하 국가 또는 공공 단체의 재산을 개인에게 팔아넘기는 일을 뜻 한다
를 시작했다. 그리고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이 독립된 정부를 출범하자 미군정청이 관리하던 적산이 우리나라로 이관되어 그 역할을 대신하게 되었다. 적산은 후에 1949년 12월에 제정·공포된 ＜귀속재산처리법＞을 토대로 1958년까지 90% 이상이 민간인에게 불하될 수 있었다.
이러한 적산 처리 과정에 있어서 맹점이 존재하였다. 이승만 정부 하에서 적산 불하는 파격적인 재정, 금융상의 혜택이 뒤따랐다. 이승만 정부가 제시한 가격은 시장가격의 1/4~1/3 수준이었고, 대기업일수록 그 편차가 더욱 컸다. 또한 이승만 정권이 암묵적으로 내세운 불하의 최우선 원칙은 신청자의 경영능력, 일제하에 그 기업과 직·간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인사들이 우선 고려되었고, 그 다음이 일제시대 관료, 은행가, 기업가를 역임한 자들에게 우선권이 돌아갔다. 그리하여 불하과정에서의 부정과 정경유착과 같은 부조리를 초래하게 되었다. 게다가 미군정 시기에서도 대부분의 적산이 일본인 소유자와 밀착했던 친일적 관리자에 의해 점유되어 왔다. 그 결과 적산은 친일, 친미 관료 및 기업가들이 해방 후 자본주의 경제의 핵심으로 성장하는 기반이 되었다. 오늘날의 재벌들의 기반을 형성해 준 것이다. 이로써 건전하고 민주적인 국민경제 건설은 상당히 지연될 수밖에 없었다. 작가의 우려하던 일이 여지없이 발생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단편소설 「술」은, 해방이라는 역사적 상황 속에서 일본 잔재 산업시설들이 한국인 노동자들의 수중에 놓이게 되고, 그 노동자들 사이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이해관계 및 이념의 대립을 비판적으로 잘 그려내고 있다.
「술」은 일본인 귀속재산과 일본인 소유 양조장의 경영권을 매개로 일어나는 갈등을 다룬 작품이다. 갈등의 구조는 개인 소유를 주장하며 개인적 신분 상승을 꾀하는 준호와 노동조합의 소유를 주장하며 변혁을 꾀하는 건섭 사이의 충돌로 나타난다. 물론 준호의 심리적 변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 그 대립이 전면에 부각되지는 않고 있다.
작품의 서두에서 ‘준호’는 해방직후 혼란의 와중에 양조장 주인 나까무라가 소주를 몰래 빼가려는 것을 완강히 막아내는 정직한 인물로 등장한다. 그러나 준호는 일본잔재라고 볼 수 있는 지배인 사택을 접수하고 그 집에 살면서 조금씩 변해간다. 처음에 집을 접수하여 일본적인 것을 일소해야 할 것이라며 가구들을 광에 몰아넣었지만 집을 소유한 후에는 생각이 변하여 일본 주인처럼 행세하게 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사회적 의미로의 양조장과 사택은 무엇보다도 재분배되고 청산되어야 할 식민지의 잔재이기 때문에 준호의 태도 변화는 시대 상황에 대한 인식이 취약하다고 볼 수 있다.
*유종호, 「황순원 전집2 목넘이 마을의 개/곡예사 : 해설 - 겨레의 기억」, 문학과 지성사, 2006
*김윤정, 「황순원 문학 연구」, 새미, 2003
*장현숙, 「황순원 문학 연구」, 시와 시학사, 1994
*정성화,「적산의 처리를 통해서 본 미국의 대한정책」, 경북대학교 사학과, 1991
*송영희, 「황순원 소설의 인물 연구」-해방기 단편소설을 중심으로-, 건국대학교 교육대학원, 199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