與韓荊州書(여한형주서) - 이백(李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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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與韓荊州書(여한형주서) - 이백(李白)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與韓荊州書(여한형주서) - 이백(李白)
▶작품 소개
시선(詩仙)으로 추앙(推仰)받는 이백(李白)은 재능(才能)과 큰 경륜(經綸)을 펼치지 못한 채 마땅한 추천자(推薦者)가 없어 서른이 넘도록 벼슬에 나가지 못했는데 형주(荊州)를 여행(旅行)하던 중 당시 형주자사(荊州刺史)로 있던 한조종(韓朝宗)이 후진(後進)을 많이 추천(推薦)하여 명망(名望)이 높음을 알아 그에게 자신(自身)을 도와주기를 바라는 편지(便紙)인 자천서(自薦書)를 썼다. 이 자천서가 이다.
▶작가 소개
이백은 자(字)가 태백(太白)이며 호(號)는 청련거사(淸漣居士)이다. 두보(杜甫)와 함께 이두(李杜)로 병칭되는 중국 최고의 시인이며, 시선(詩仙)이라 불린다. 1,100여 편의 작품이 현존한다. 그의 생애는 분명하지 못한 점이 많아, 생년을 비롯하여 상당한 부분이 추정에 의존하고 있다. 출생지는 오늘날의 사천성로서 어린 시절을 촉(蜀)나라에서 보냈다. 그는 25세 때 촉나라를 떠나 양자강(揚子江)을 따라서 강남(江南) · 산동(山東) · 산서(山西) 등지를 편력하며 한평생을 보냈다. 43세경 현종(玄宗)의 부름을 받아 창안(長安) 서한(西漢)·수(隋)·당(唐)나라 때의 수도. 지금의 섬서성(陝西省) 장안현(長安縣).
에 들어가 환대를 받고, 한림공봉(翰林供奉) 한림학사(翰林學士), 한림대조(翰林待詔), 한림공봉(翰林供奉)으로 칭하기도 한다. 당 현종(玄宗)이 개원(開元: 713-741)연간에 처음으로 설치한 관직으로 문사(文史)와 경학(經學)에 뛰어난 선비들을 선발하여 궁궐에서 천자를 모시게 하였는데, 주로 표(表), 소(疏)에 답하거나 황제의 조서(詔書) 꾸미는 일을 담당하였음.
이 되어 2년 간 궁중에서 지냈다. 이때가 그의 최고의 생애였다. 그는 궁정에서 자신의 정치적 포부의 실현을 기대하였으나, 이백의 임무는 포고문 초안을 마련하거나, 임금의 향연에 불려나가 임금의 치적을 칭송하는 시를 짓는 일이 고작이었다. 어지러운 조정 분위기와 일종의 어용 문학인으로서의 처지에 답답함을 느낀 이백은 결국 장안의 한량들과 술을 마시고 노는데 몰두한다. 방약무인한 태도 때문에 현종의 총신 고력사(高力士) 당(唐)나라 현종(玄宗)의 사랑을 독차지한 환관(宦官).
의 미움을 받아 마침내 궁정을 쫓겨났다. 결국 그는 744년에 고향으로 돌아가 도교에 정식으로 귀의하기도 했다. 나이 55세에 안녹산(安祿山)의 난 중국 당나라 현종 말엽인 755년에 안녹산과 사사명이 일으킨 반란. 현종은 촉나라에 망명하여 퇴위하고 반란군도 내부 분열로 763년에 평정되었으나 당의 중앙 집권제가 흔들리는 전환점이 되었다. [비슷한 말] 안사의 난.
을 겪으면서 부인의 만류를 듣지 않고 이린(李璘=영왕(永王))의 막료가 되었으나, 실패로 끝나자 투옥되었다가, 곽자의 중국 당나라의 무장(697~781). 안녹산의 난을 토벌하여 도읍 장안(長安)을 탈환하였고, 뒤에 토번(吐蕃)을 쳐서 큰 공을 세워 사도(司徒), 중서령(中書令)에 이어 분양왕(汾陽王)으로 봉하여졌다.
의 도움으로 죽음을 면하였다. 그 후 야랑(夜郞)으로 유배하는 도중에 사면되었는데, 그의 나이 59세였다. 그 후 그는 금릉 · 쉬안청 사이를 방랑하였으나 노쇠한 탓으로 당도의 친척 이양빙(李陽氷)에게 몸을 의지하다가 그 곳에서 병사하였다.
▶원문과 해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