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베를렌의 영향과 수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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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제 2장. 폴 베를렌의 영향과 수용
김억과 김영랑의 경우를 중심으로
1. 베를렌의 생애와 작품세계
프랑스 육군 장교의 외아들로 태어난 폴 베를렌은 ‘고답파’의 정신과 이 운동을 선도했던 샤를르르콩트 드 릴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고, 프랑스 상징주의 시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대학을 중퇴하고 파리 시청의 서기로 근무하면서 시를 쓰기 시작했고 그가 쓴 최초의 시는 당대의 거장 빅토르 위고에게 보냈던 「죽음」(1858)으로 알려져 있다. 그 후 지속적으로 시를 쓰면서 당시 카페와 살롱에서 말라르메, 빌리 드 릴, 아나톨 프랑스 등과 교류하였다. 이 시기에 「프뤼돔 씨」(1863)를 공식적으로 처음 발표하였으며 ‘고답파’라는 명칭이 유래하게 된 이들 시인들의 작품집 『현대 파르나스』(1866)에 여덟 편의 시를 발표했다.
베를렌은 당시 16세였던 마틸드 모테와 사랑에 빠져 1870년에 결혼했다. 약혼시절 그는 자신의 시 「아름다운 노래」에서 마틸드를 자신을 올바른 길로 이끌어 줄 ‘구세주’로 표현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점은 그의 시집 『아름다운 노래』(1870)에서 확인할 수 있다. 시의 대부분을 직접적인 어휘와 자연의 지시체를 활용하여 표현하였고, 자신의 아내에 대한 사랑을 선명하게 나타내었다.
‘제 3공화국’(1870~1940)의 출발과 함께 베를렌은 ‘국민근위대’에서 복무하게 되었지만, 곧바로 ‘파리코뮌’을 지지하는 ‘코뮈나르’가 되어 파리코뮌의 출판국에서 홍보담당 책임자로 활동했다. 이로 인해서 베를렌은 ‘제 3 공화국’으로부터 보복당할 수도 있다는 불안감에 시달려 프랑스 북부의 ‘파드칼레’로 피신했다. 그의 이러한 불안감은 그가 훗날 자유분방한 방랑생활을 하게 된 원인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파드칼레’로 피신해 있던 베를렌은 1871년 파리로 되돌아왔으며, 그해 9월 아르튀르 랭보가 몇 편의 시를 동봉한 두 통의 편지를 받게 되었다. 동봉된 시에는 「모음들」을 비롯하여 「계곡의 잠자는 사람」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대자연의 여러 가지 특징과 잠들어 있는 군인에 대한 위로를 표현한 시이다. 랭보의 편지와 시를 읽은 베를렌은 랭보를 초청했고 곧이어 랭보가 파리에 도착하여 약 3개월 정도 베를렌의 집에 머물렀다. 그 당시 베를렌의 아내 마틸드는 17세로 임신하고 있었지만, 베를렌은 랭보와의 사랑을 선택했다. 랭보와 함께 런던으로 가서 이들은 자유롭게 지냈다. 하지만 서로간의 갈등으로 다투는 일이 잦아졌고 결국 1873년 베를렌은 만취상태에서 18세의 랭보에게 두 발의 권총을 발사하여 왼쪽 손목을 맞췄다. 이 사건으로 인해서 베를렌은 감옥에 투옥되어 2년간 복역하게 되었다. 이렇게 랭보와의 관계는 끝이 났고 또한 옥중에서 마틸드와 이혼이 선고된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시기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는 시집 『말없는 로망스』(1874)는 그의 베를렌의 친구 에드몽 르펠티에가 출판해주었다.
출옥한 베를렌은 영국과 프랑스에서 학생들을 가르쳤고 이때 자기 수업을 듣던 학생 루시엥 레티느와에게서 더 많은 시를 쓸 수 있는 영감을 받게 되었으나 그 소년이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망연자실했다. 아울러 베를렌의 시집 중에서 최고의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는 『예지』(1880)를 출판했다.
베를렌의 말년은 약물중독, 알콜중독, 가난 등으로 점철되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는 『옛날과 얼마 전』(1884)을 출판했다. 프랑스 국민들은 그의 시세계를 재평가하게 되었고 얼마간의 재정적인 지원을 받았으며 동료들에 의해서 1894년 프랑스의 ‘시의 왕자’로 선정되었다. 베를렌의 시는 획기적인 것으로 평가되고 인정되었으며, 가브리엘 포레와 클로드 드뷔시와 같은 작곡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베를렌은 파리에서 1896년 5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시집 외에도 랭보와 말라르메 등의 시세계를 조명한 평론집 『저주받은 시인들』(1884), 자신의 생애를 회상한 『나의 감옥』(1893), 『참회록』(1895)등을 남겼다.
프랑스의 시인 중에서 가장 순수한 서정시인의 한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는 베를렌은 프랑스어의 특징과 그 음악성을 한 편의 시로 형상화하는데 있어 뛰어난 선구자였다. 그는 자신의 시에서 지나친 수사법을 배제하려고 노력했으며 이해 불가능한 지성의 남용을 억제함으로써 일반 독자들에게 가깝게 접근할 수 있는 시적 환경을 마련하였다. 프랑스어를 발음할 때에 나타나는 음악성과 암시성을 통해서 일상적이고 보편적인 의미를 한층 더 고양시켰을 뿐만 아니라 시어와 시어의 상호연관성에 의해서 프랑스어의 고유성을 계발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심오한 내옹이나 철학적인 난해성보다는 내밀한 음악성과 감수성을 더 강조한 시인이다.
2. 베를렌의 시세계와 한국 현대시의 관계
2.1 베를렌의 시 「가을의 노래」와 김억의 역할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 중 베를렌의 시세계가 한국 현대시에 끼친 영향과 수용, 전용과 변용의 과정을 그의 시 「가을의 노래」를 중심으로 비교하고, 그의 시세계가 한국 현대시의 운율의식과 음악성에 끼친 영향관계를 살펴보고자 한다. 베를렌의 시 「가을의 노래」를 한국문단에 소개하는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한 김억의 활동은 『태서문예신보』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특히 베를렌의 시 「가을의 노래」와 시적 운율의 중요성을 소개한 점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베를렌의 시세계와 한국 현대시의 관계를 비교하는 데 있어서 『태서문예신보』에 소개된 베를렌의 시세계를 중심으로 하여 베를렌의 시 「가을의 노래」와 김억의 역할 및 다른 시인들의 번역시와 창작시, 베를렌의 시와 김영랑의 시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운율의식 등을 비교하고자 한다.
베를렌의 시 「가을의 노래」와 한국 현대시의 관계는 프랑스 상징주의에 대한 김억의 역할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는 『태서문예신보』에서 베를렌의 시세계를 소개했으며 「가을의 노래」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김억은 베를렌의 시 「가을의 노래」와 「퇴색의 달」을 ‘가장 잘 음악적 방면을 표현한’ 시로 파악하였다. 「가을의 노래」를 『태서문예신보』에 맨 처음 번역하여 수록한 이후에도 김억은 자신의 번역시를 수정 보완하여 『폐허』,『오뇌의 무도』,『개벽』에 수록했다. 그가 베를렌의 이 시를 몇 번에 걸쳐 수정 보완하여 재번역한 까닭은 프랑스어와 한국어의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번역시가 베를렌의 시에 나타나 있는 시적 음악성을 반영할 수 있도록 노력했기 때문이다. 김억이 네 번에 걸쳐 번역한 베를렌의 시 「가을의 노래」는 시행과 시구의 배열에 있어서도 음수율과 자수율에 주의를 기울였으며, 이러한 과정을 거쳐 김억은 한국어의 여러 가지 특징을 고려하여 재번역하게 된다.
김억 외에도 이하윤은 『해외문학』창간호와 『이하윤 역시 불란서시선』에, 이원조는 『해외서정시집』에 베를렌의 이 시를 각각 번역하여 수록하였다. 이처럼 당대의 한국 현대시인들 대부분이 베를렌의 시 「가을의 노래」를 직접 번역하거나 창작시에 전용한 까닭은 일제강점기의 전체적인 분위기 즉 우울하고 암담한 당시의 현실을 간접적으로 표출하는 데 있어서 베를렌의 이 시가 많은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김억은 베를렌의 시 「가을의 노래」를 한국문단에 소개하기 이전에 자신의 시 「반야」에서 “야반의 울림 종소리에/ 내 가슴은 울리며 반향나도다”와 같이 베를렌의 시를 활용하였다. 자신이 번역하여 한국문단에 소개한 베를렌의 시의 시적 분위기, 이미지, 시어 등을 김억은 자신의 시집 『해파리의 노래』(1923)에서 전용하기도 하고 변용하기도 하였다. 김억 외에 베를렌의 「가을의 노래」에 대한 전용은 박종화의 시 「눈물은 흘러서」, 김동명의 시 「나는 보고 섯노라」, 「종소리」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처럼 김억이 소개한 「가을의 노래」는 지속적으로 한국 현대시에 영향을 끼쳤으며, 김억의 시 「악군」에는 이러한 점이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