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삼국유사 -연오랑과 세오녀, 내물왕과 박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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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삼국사기/삼국유사 -연오랑과 세오녀, 내물왕과 박제상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연오랑과 세오녀
1.삼국유사의 내용과 그 시대를 통치한 아달라이사금의 삼국사기 기록
2.연오랑과 세오녀의 설화에서 주목해야 할 점

내물왕과 박제상
1.삼국유사, 삼국사기의 기록
본문내용

제 8 대 아달라왕 즉위 4년 정유에 동해가에 연오랑과 세오녀라는 부부가 살았다. 하루는 연오랑이 바다로 가 해초를 캐고 있었는데 갑자기 바위 하나 (고기 한 마리라고도 한다)가 연오랑을 업고 일본으로 갔다. 일본 사람들이 보고 이상한 사람이라 하여 왕으로 삼았다 (日本帝記를 살펴보면 신라 사람으로 왕이 된 사람이 없으니 아마 변방 시골의 조그만 왕이고 중앙의 왕은 아닌 듯하다) 세오녀는 남편이 돌아오지 않자 찾아가 남편이 벗어 놓은 신을 보고 바위로 올라가니 바위가 다시 업고 갔다. 그 나라 사람들이 놀라서 왕에게 알리니 부부가 서로 만나 귀비가 되었다.
이때 신라에서는 일월의 빛이 없어지니 점성가가 말하기를 일월의 정기가 우리 나라에 와 있다가 지금은 일본으로 갔기 때문에 이러한 변괴가 있다 한다. 왕이 사신을 보내어 두 사람이 오기를 청하니 연오랑이 내가 여기에 온 것은 하늘이 시킨 것인데 어떻게 돌아가겠는가, 그러나 짐의 왕비가 짜놓은 가든 비단이 있으니 이것으로 하늘에 제사 하라 하며 그 비단을 주었다. 사신이 돌아와 아뢰고 그 말대로 제사지내니 일월이 옛날처럼 되었다. 그 비단을 어고에 소장하여 국보로 삼고 그 창고의 이름을 귀비고라 하고 제사 지낸 곳을 영일현 또는 도기야 라 하였다

신라본기(新羅本紀) 제2
아달라이사금
아달라이사금이 즉위하니, (이는) 일성왕의 장자다. 키가 7척이요, 코가 크고 상이 기이하였다. 어머니는 박씨, 지소례왕의 딸이요, 비는 박씨, 내례부인이니 (이는) 지마왕의 딸이다.
원년 3월에 계원으로 이찬을 삼아 군국정사를 맡겼다.
2년 정월에 (王이) 친히 시조묘에 제사하고, 죄수를 대사하고, 흥선으로 일길찬을 삼았다.
3년 4월에 서리가 내렸다. 계립령의 길을 열었다
4년 2월에 감물 마산의 이현을 처음으로 두었다. 3월에 (王이)장령진을 순행하여 수졸을 위로하고 각기 정포를 주었다.
5년 3월에 죽령을 열었다. 왜인이 내빙하였다.
7년 4월에 폭우가 와서 알천이 넘쳤으므로 인가가 떠내려가고 금성 북문이 저절로 무너졌다.
8년 7월에 누리가 곡물을 해치고 해어가 많이 나와 죽었다.
9년에 (王이) 사도성을 순행하여 수병을 위로하였다.
11년 2월에 서울에 용이 나타났다.
12년 10월에 아찬 길선이 모반하다가 발각되자, 죽일까 두려워하여 백제로 도망하였다. 왕이 글을 보내어 (돌려보내기를) 요구했으나, 백제가 허락지 아니하였다. 왕이 노하여 군사를 내어 치니, 백제는 성을 둘러 지키며 나오지 아니하는지라 아군은 군량이 다하여 이에 돌아왔다.
13년 정월 초하룻날 신해(辛亥)에 일식이 있었다.
14년 7월에 백제가 국서의 이성을 습격하여 부수고, 민구 1,000명을 사로잡아 갔다. 8월에 일길찬 흥선을 명하여 군사 2만명을 거느리고 백제를 치게 하고 왕도 또 기병 8,000명을 거느리고 한수로부터 육박하니, 백제가 크게 두려워하여 사로잡았던 남녀를 (도로) 돌려보내며 화친을 청하였다.
15년 4월에 이찬 계원이 죽었으므로, 흥선으로 (대신) 이찬을 삼았다.
17년 2월에 시조묘를 다시 수리하였다. 7월에 서울에 지진이 있었고, 서리와 우박이 와서 곡식을 해쳤다. 10월에 백제가 (新羅의) 변계를 침구하였다.
18년 봄에 곡식이 귀하여 민간에 기근이 있었다.
19년 정월에 구도로 파진찬을 삼고 구수혜로 일길찬을 삼았다. 2월에 시조묘의 제사가 있었고, 서울에 유행병이 크게 번졌다.
참고문헌
김부식저, 이병도역 을유문화사.1996
석일연저, 권상노역 삼원사.1995
박영규 웅진닷컴.2001
박진태외 도서출판 박이정
홍하상 비전코리아
하고 싶은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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