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 백제의 부흥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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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역사학] 백제의 부흥운동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목 차

1. 서론

2. 백제 부흥군 지휘관들과 활동

3. 백제 부흥의 원인

4. 일본은 왜 백제를 도와주었는가?
본문내용
1. 서론
나라를 다스리기란 무척이나 힘들고 어려운 일이다. 나라를 대표하는 사람들 국회의원, 대통령등 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이 나라를 제대로 다스리지 못해 나라가 망하게 된다면 무척 슬플 것이고 나라를 잃은 슬픔에 견디지 못하고 안타까워 할 것이다. 우리나라도 일제강점기를 겪으면서 나라가 독립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렇게‘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그렇게 나라를 잃은 마음은 한 없이 슬픈 것일 것이다. 백제가 나․당 연합군에게 멸망하고 후에 나라를 다시 일으키려는 사람들의 모습을 지금부터 살펴보려고 한다.

2.백제 부흥군 지휘관들과 활동
① 정무
부흥군이 일어날 때 그 지휘관으로서 최초로 보이는 인물을 좌평 정무이다. 정무는 두시원악을 근거로 하여 나당점령군에 대항하였다. 정무가 군사를 일으킨 시기는 분명하지 않으나 태종무열왕 7년조에 의하면 나당점령군이 백제도성의 점령을 축하하는 잔치를 벌인 660년 8월 2일 이후에서 임존성을 공격한 8월 26일 이전의 어느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정무가 부흥군을 일으킨 두시원악은 방성이 아닌 것이 분명하므로 군이나 현 정도의 지역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군급의 지역에 파견되는 지방관은 덕솔의 관등 소지자가 파견되는 것이 원칙이었고, 경우에 따라서는 달솔의 관등 소지자도 파견되기도 했지만 좌평의 관등을 가진 자가 장관으로 파견된 예는 없었다. 이렇게 볼 때 좌평 정무는 두시원악에 파견된 지방관이 아니라 이 지역을 기반으로 한 세력자로 추측할 수 있다. 의자왕대에 대좌평 사택지적의 세력기반이 나지성에 있었다고 한 사실이 그 방증이 되지 않을까 한다. 그렇다고 하면 정무는 자신의 세력기반인 두시원악을 근거지로 하여 부흥군을 일으켰다고 할 수 있겠다.

②흑치상지
흑치상지는 약관의 나이(20살 정도)에 달솔의 관등을 받았고 그 후 어느 시기에 풍달군의 군장이 되었다. 풍달군장으로 있던 그는 30세 되던 해인 660년에 의자왕이 나당점령군에 항복하자 “예에 따라 항복을 드렸다.”라고 한 것에서 보이듯이 저항을 포기하고 스스로 나당점령군에 항복하였다. 그러나 나당점령군이 후에 군대를 풀어 노략질을 하고 많은 장정들을 죽이는 것을 보자 흑치상지는 자기에게도 화가 미칠까 두려워 마침내 좌우 보좌관들을 거느리고 자신의 본거지로 돌아가 부흥군을 일으켰던 것이다. 흑치상지가 거병한 시기에 대해서는 소정방의 귀국 전 거병과 귀국 후 거병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중 어느 것이 정확한지는 단정하기 어렵다.
흑치상지의 활약여부는 삼국사기에 조금 기재되어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처음에 흑치상지가 도망하여 흩어진 군사를 모으니, 10일 동안에 귀부하는 무리가 3만 명이나 되었다. 소정방은 군사를 파견하여 이를 공격하였으나 흑치상지는 이를 막아 싸워 패배시키고 다시 2백여 성을 회복하니, 소정방은 능히 이기지 못하였다.”
흑치상지가 임존성을 근거로 당군과 싸웠다는 것과 이 전투가 소정방이 회군하기 전에 이루어졌다는 사실에 근거할 때 그가 660년 7월 20일 이후에서 8월 26일 이전의 어느 시기에 부흥군을 일으켰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참고문헌
※ 참고자료
백제 부흥운동사, 노종국
백제는 일본의 기원인가, 김현구 i
삼국사기 하권 김부식 지음, 김종권 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