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계열] 신사임당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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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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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신사임당의 생애

신사임당의 활동

신사임당의 역활

선구자 신사임당
본문내용
얼마 전 새로 발행된 5만원권 지폐에 신사임당(申師任堂)의 모습이 인쇄되어 유통되고 있습니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은 그녀를 생각하며, 현모양처(賢母良妻)를 떠올릴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녀에게서 여러 그림과 시조 등을 남긴 예술가보다 현모양처를 먼저 연상하는 사실은 의문이 듭니다. 그녀는 연산군 10년(1504) 10월 29일 강릉에서 신명화의 차녀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중종 17년(1522) 서울 사람인 이원수와 혼인합니다. 혼인 후 친정인 강릉에서 살다가 율곡 이이를 비롯한 여러 아이를 낳았고, 1541년 38세가 되어 서울 시집으로 거처를 옮겼으며, 명종 5년(1551) 48세로 사망합니다.
그러므로 그녀의 시집 생활은 생애의 5분의 1 정도 되는 10년 남짓입니다. 이것은 혼인하면 무조건적으로 시집에 전념했던 당시 여성의 모습과는 전적으로 대조됩니다. 그리고 이것은 그녀의 어머니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임당의 아들로 조선의 대표적 성리학자이자 정치가인 율곡 이이가 쓴 「이씨감천기(李氏感天記)」는 사임당의 어머니 이씨가 남편 신명화가 위독하자 왼손 중지 두 마디를 자르며, 자신의 몸으로 남편의 생명을 대신해달라고 하늘에 빌어 신명화의 병이 나았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은 「중종실록(中宗實錄)」에도 실려 있으며, 이로 인해 이씨는 열녀로 선정됩니다.
그런데 이씨감천기에는 그 이전의 사실도 전하고 있습니다. 앞서 언급한 단지(斷指) 사건의 주인공인 율곡의 외할머니 이씨는 혼인 후 시댁인 서울로 갔다가 어머니가 병이 들자 강릉에 돌아갔으며, 찾아온 남편에게 각각 서울과 강릉에서 각자 노모를 모시자고 제안하고 그렇게 16년을 지냈습니다. 그 16년 동안 강릉과 서울을 오가던 신명화가 여독으로 병이 나자 이씨는 외증조부의 묘소로 달려가 문제의 단지 사건을 일으킨 것입니다. 어쨌든 그녀의 남편을 위하는 마음은 알겠지만 부부의 거처는 남편 쪽이어야 하고, 시집간 딸의 친정 출입을 엄격히 통제했던 시절임을 고려하면 이해하기 힘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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