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문] 중국의 영화 창작경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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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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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 목 차 ==

Ⅰ. 들어가는 말․․․․․․․․․․․․․․․․
Ⅱ. 1930년대 中國映畵의 創作傾向 ․․․․․․․
1. 左翼映畵運動期․․․․․․․․․․․․․․
2. 中國戰爭時期․․․․․․․․․․․․․․․
Ⅲ. 地域別 映畵創作活動․․․․․․․․․․․․
1. 中國黨通治地區의 映畵 ․․․․․․․․․․
2. 홍콩映畵․․․․․․․․․․․․․․․․․
3. 上海의 孤島映畵 ․․․․․․․․․․․․․
4. 延安地域의 映畵 ․․․․․․․․․․․․․
※ 參考文獻․․․․․․․․․․․․․․․․

본문내용
Ⅰ. 들어가는 말
映畵가 처음 만들어진 것은 1895년 말이다. 프랑스의 뤼비에르 형제가 직접 만든 영사기로 짤막한 映畵를 만들어 상영한 것이 시초로 이른바 “제 7藝術”이라고 일컬어지는 映畵가 세상에 등장하였다. 이후로 20세기말에 이르는 약 백년동안 映畵는 發展에 발전을 거듭하여 오늘날 이 지구상에서는 어느 예술분야보다도 영향력이 큰 분야가 되었다.
1895년의 최초의 映畵上映이후 이듬해 1896년 8월11일 中國 上海의 서쪽 교외에 위치한 서원의 又一村이르는 곳에서 "西洋影戱"가 처음으로 상영되어 中國映畵의역사가 시작되었다. 映畵誕生 直後인 19세기말과 20세기초 中國에서 映畵는 매우 빠른 속도로 보급되고 발전되었다.
이 時期의 中國映畵는 西歐에서 輸入했거나 西歐의 映畵를 모방한 映畵가 아니라, 中國內에서 제작된 中國式 스타일의 映畵로 19세기말 西歐映畵가 소개된 이후 中國映畵人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中國식의 映畵를 만들기 위한 노력을 꾸준히 해왔다.
映畵傳來 초창기에는 외국인들이 中國에서 映畵를 방영하고 제작하는 과정을 도맡았다. 그러다가 1905년 北京의 豊泰照想館에서 京劇공연실황을 映畵한 일종의 記錄映畵인 《定軍山》을 상영한 것이 中國인에 의한 中國映畵의 역사가 시작되는 기점이 되었다.
1905년은 中國映畵의 원년인 셈이다. 이후 中國映畵의 역사는 대체로 다섯 가지로 나누어진다.
첫 번째 시기는 1905년부터 1931년의 시기로 中國映畵의 제1세대들이 西歐로부터 映畵라는 예술을 배워서 中國에 이식하는 단계에 해당된다. 이 시기에는 中國映畵의 독립을 위한 다양한 시도들이 이루어지고 반면에 장기적인 예측이 전혀 불가능한 상태였으나, 1920년대를 거치면서 그들이 만들었던 中國映畵들은 中國 도시 서민들의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길을 개척하였다.
두 번째 시기는 1932년부터 1949년까지의 시기이다. 이 時期는 中國現代史의 激變期이자 混亂期였으나 中國의 映畵의 존재 가치를 입증한 시기였다.
세 번째 시기는 1949년부터 1966년에 이르는 時期로 中國映畵의 振興期라고 할만하다. 1966년의 文化大革命으로부터 19789년 改革開放의 기치가 올랐던 때까지의 기간은 映畵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문화활동이 극도로 침체했던 시기였으며, 마지막 다섯째 시기는 오늘날까지를 포괄하는 文化大革命 終了以後 최근까지의 시기이다.
이 다섯 시기로 나누어진 中國映畵의 역사시기 중에 가장 격변기였던 두 번째 시기 1930년대의 中國映畵는 어떤 경향으로 만들어졌는지 다음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Ⅱ. 1930년대 中國映畵의 創作傾向
1. 左翼映畵運動期
1930년대초 中國의 映畵사들은 급속하게 유성영화 제작의 단계로 접어들면서 많은 中國적인 映畵를 모색하는, 일종의 탐색기를 보내며 映畵를 만들었다.
中國적인 映畵가 모색된 데에는 시대상황의 영향이 컸다. 1930년 3월 상해에서 魯迅을 비롯한 50여명을 발기인으로 하여 左翼문화예술인 단체인 中國左翼作家聯盟이 결성되었다. 뒤이어 여러 산하기구들이 활동을 하던 이 때는 滿洲事變과 上海事變이 일어남에 따라 中國人들 사이에서는 抗日이라는 애국적 정서가 분출하고 민족주의의 물결이 고조되었다. 1932년 中國 共産黨은 그러한 시대적 분위기를 파악하고 조익과 같은 左翼文人團體와 지식인 단체를 통하여 映畵를 자신들의 정치이념을 널리 선전할 수 있는 일종의 大衆運動 수단으로 만들고자 노력했다. 이 밖에도 抗日, 救國, 國民的 覺醒들과 같은 애국적 주제를 점차 많이 취급하게 되었다.
1930년 이후로는 中國人들의 봉건적인 의식에 영합하고, 황당한 오락거리를 제공함으로써 관객을 동원해왔던 娛樂映畵를 통해 中國映畵文係가 번영을 구하기는 점차 어려워졌다. 대신 현실적이고 시대적인 문제를 보도하고 표현하는 매체로서의 映畵의 의미가 점차 부각되기 시작하였다. 이로써 中國映畵는 오락물이 가지지 못하는 힘과 활력을 얻을 수 있었다. 그 힘은 映畵製作者들의 눈길이 현실 도피적인 소재들로부터 현실생활 그 자체로 옮겨오고 얻게 된 映畵예술의 역동성 같은 것이었다. 사실 國家社會가 위기에 봉착해 있던 1930년대라는 상황이 아니었다면 그런 작품들이 당시와 같이 관객의 호응을 받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中國人들의 애국적 정서가 고조되어 있었던 1930년대 초반부터 1937년 中日戰爭이 발발하기까지의 기간은 左翼映畵運動이 활발하게 전개된 시기였다. 1933년 3월 映畵의 중요성을 인식한 中國 共産黨은 電影小小祖를 구성하여 夏衍 극본에 程步高 監督의 《狂流》는 농촌의 계급투쟁을 묘사한 최초의 映畵로서 본격적인 左翼映畵라고 할 만하다.
참고문헌
1. 김영구,「중국속문학개론 지강강좌」, 서울 : 한국방송통신대학교, 1999.
2. 󰠏󰠏󰠏󰠏󰠏󰠏, “중국속문학개론 학보특강”, 서울 : 한국방송대학보사,1999.4.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