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유클리드 기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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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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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비유클리드 기하학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I. 기하학의 발견
II. 비유클리드 기하학을 위한 수학자들의 업적
III. 쌍곡기하학
Ⅳ. 타원기하학(리만기하학)
V. 비유클리드 기하에 관련한 문제
본문내용
I. 기하학의 발견

유클리드 기하학의 기초가 되는 다섯 개의 공준은 다음과 같다.

공준 1. 임의의 점으로부터 임의의 점에 대해 하나의 직선을 그을 수 있다.
공준 2. 한 직선에 유한의 직선을 무한히 연장할 수 있다.
공준 3. 임의의 점을 중심으로 하고 그 중심으로부터 그려진 임의의 유한 직선과 동일한 반지름을 갖는 원을 그릴 수 있다.
공준 4. 모든 직각은 서로 합동이다.
공준 5. 한 직선이 두 직선과 만날 때 같은 쪽에서 2직각보다 작은 안각을 만든다면, 이들 두 직선을 한없이 연장하면, 2직각보다 작은 각이 만들어진 쪽에서 만난다.

처음 두 공준은 직각자를 가지고 그려봄으로서 얻어질 수 있고, 세 번째 공준은 컴퍼스를 가지고 그려보면 알 수 있다. 네 번째 공준은 각도기를 가지고 각을 측정해보면 알 수 있다. (여기서 보각의 합은 180°이고, 따라서 보각이 서로 합동이면 그들은 각각 90°가 되어야한다.) 여기서 5번째 공준을 평행선 공준이라고 하는데 유클리드 기하가 공표된 후에, 많은 수학자들은 유클리드의 제5공준에 대해 의심스러워하였다. 유클리드는 ‘원론’에서 인간이 직관적으로 자명하다고 느껴서 의심스러워하지 않는 명제들을 공준 또는 공리로 내세우고, 공리와 공준으로부터 참인 수학 명제를 연역적으로 추론하였다. 그러나 제5공준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제5공준의 내용을 자세히 읽거나 도형을 그리면서 의미를 파악해야 한다.
18세기에서 19세기 전반에 걸쳐 많은 기하학자들이 평생선 공준이 다른 4개의 공준에 종속적인가를 의심하면서 4개의 공준으로부터 제5공준을 유도하고자 시도하였다. 특히 18세기 초 사케리가 이 공준을 유클리드 원론의 다른 공준에서 얻으려는 시도에서 평행선 공준의 논의에 대하여 중요한 공헌을 하여 비유클리드 기하학의 선구자가 되었다. 19세기 초에 로바체프스키와 볼리아이는 평행선의 공리를 대담하게 부정하여 이것과 유클리드의 다른 공리로부터 새로운 하나의 기하학을 건설하였다. 같은 사상을 갖고 있던 가우스와 함께 이들은 비유클리드 기하학의 발견자이다.
초창기의 비유클리드 기하학은 직선 위에 놓이지 않은 한 점을 지나면서 이 직선에 평행한 직선은 무한히 많이 존재하는 기하학으로서, 초기에는 논리적으로 가능하다는 사실만이 증명된 것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이 기하학이 모순을 내포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 따라서 유클리드의 평생선 공준이 원론의 다른 공준으로부터 독립적이라는 사실이 명백해지기는 19세기 말엽에서 20세기에 들어오면서부터이다. 케일리, 클라인, 프앙카레 등의 유클리드 공간에서의 비유클리드 기하학의 모델과 벨트라미의 미분기하학적인 모델이 제시됨으로서, 비유클리드 기하학은 실제로 존재하는 기하학이 되었다.


II. 비유클리드 기하학을 위한 수학자들의 업적


1) 가우스의 업적
실제로 비유클리드 기하학을 최초로 예감한 사람은 수학 황제의 영광을 누리고 있었던 가우스(Carl Friedrich Gauss, 1777~1855)였다. 그러나 가우스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자신이 발견한 것을 세상에 알리지 않았다.
첫 번째 이유는 칸트(Immanuel Kant, 1724~1804)의 비유클리드 공간관이 널리 일반에게 보급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칸트는 1781년『순수 이성비판(Critique of Pure Reason)』에서 “유클리드 공간의 개념은 결코 경험적인 근원에 의한 것이 아니라 피할 수 없는 사고의 필연성이다.”라고 말하였다. 즉 공간은 인간의 마음에 직관적으로 이미 존재하는 체제이고, 유클리드 기하학의 공리와 공준은 인간의 마음에 부과된 선험적인 판단이며, 이 공리와 공준 없이는 공간에 대한 어떠한 무모순의 추론도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또한 이것은 그 당시의 수학적 사고를 지배하고 있었다. 따라서 평행선 공준의 독립성을 주장한 것은 칸트의 철학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셈이었고, 결과적으로 유럽의 사상계를 지배하던 권위적인 견해와 맞서야 하는 엄청난 부담을 안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가우스는 이 사실을 발표하면, 당시의 수학계나 과학계 또는 철학계에 너무나 큰 충격을 줄까 두려워 이의 발표를 꺼렸다. 1829년에 가우스는 비유클리드 기하학에 대한 그의 연구 결과들을 발표하라는 친구의 독촉에 대한 대답으로 “나의 견해를 명확히 밝혔을 때 멍청한 사람들이 짖어대는 소리가 두렵기 때문에 아마도 내 생전에 발표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라고 베셀에게 쓴 편지에서 언급하였다.
두 번째 이유는 그가 단지 완성된 작품만을 발표하는 완전론자라는 점이다. 완전한 작품에 대한 그의 강한 애착은 그의 인장에 쓴 제명 “적지만 익은(pauca sed matura)”을 보면 알 수 있다.
세 번째 이유는 가우스가 비유클리드 기하학에 대한 그의 결과들을 세련된 형태로 설명할 기회를 갖지 못한 것은 가우스가 수학의 많은 분야에서뿐만 아니라, 천문학과 측지학 그리고 물리학 등에서 독창적인 작업에 몰두하고 있었기 때문일 거라는 것이다. 그러나 가우스는 아마도 자신의 가장 오래되고 절친한 친구(볼프강 볼리아이)의 아들(야노스 볼리아이)과 함께 발견의 선후 논쟁에 휘말리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일 거라는 추측도 있다. 그의 진전된 결론들은 단지 관심을 두고 있던 친구들에게 보낸 편지와 많은 수학자들이 평행선 공준에 관하여 수행한 증명에 대하여 가우스에게 자문을 구했을 때의 답꺥 발그리고 1816년과 1822년의 『괴팅겐 학계보고』로 제출된 두 편의 짧은 평론과 죽은 뒤에 그의 서류에서 발견된 1831년의 몇 개의 노트에서 수집된 자료를 통해서 알려지고 있을 뿐이다. 비록 그 자신이 발표하는 것을 삼가 하였지만, 가우스는 유사한 연구를 지속하는 다른 사람들을 격려하려 애썼스 볼견우스의 스승인 괴팅겐 대학 교수인 캐스트너(A.G.Kasstner, 1719~1800)는 평행선 공준이 다른 공준과 공리로(야 증명될 수 없다고 확신하였으며, 평행선 공준을 증명하려는 시도에 관한 역사를 충분히 알고 있어 그의 영향을 받은 가우스는 평행선 공준을 증명하려는 노력이 헛된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1817년에 가우스는 올베르스(W.Olbers)에게 “나는 우리논쟁에 휘말리기하학의 필연성이 적어도 인간의 지성에 의해서는 증명될 수 없음을 더욱 더 확신하게 되었다. 어쩌면 또 다른 세상에서 우리는 자연의 본질에 대한 통찰력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 곳에 도달할 수가 없다.”는 편지를 썼으며, 1831년에 친구인 슈마허(H.C.Schumacher)에게는 자신은 15살 때인 1792년에 이미 “평행선 공준이
성립하지 않는 논리적인 기하학이 존재할 수 있다.”는 생각을 포착하였다는 편지를 쓴 적이 있었다. 이 새로운 기하학을 가우스는 처음에는 “반 유클리드 기하학(Anti-Euclidean geometry)"이라 불렀고, 나중에는 ”별들의 기하학(Astralgeometry)", 마지막으로 “비유클리드 기하학(Non -Euclid geometry)"이라고 불렀다.
가우스는 삼각형의 내각의 합이 2직각(180°)이 되는 평행선 공준을 쓰지 않고 증명하려고 했으며, 실제로 삼각형의 내각의 합이 실제로 2직각(180°)이 되는지의 여부를 확인하기 위하여 조사한 사실까지 있었다. 그는 독일 국내의 서로 멀리 떨어진 산 브로켄(Brocken), 호엔하겐(Hohehagen)과 인젤베르크(Inselsberg)의 산봉우리를 꼭짓점으로 하는 삼각형의 내각을 스스로 측량하여 그가 발명한 최소제곱법에 의해 측정값을 정밀히 처리하였는데, 이 삼각형의 내각의 합은 2직각(180°)보다 더 컸다. 그러나 처리된 값과 2직각(180°)의 차는 측정오차의 범위 내에 머물었기 때문에 아무런 결과를 얻지 못하였으나, 후에 그는 측정한 삼각형의 크기가 너무 작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가우스는 앞의 이유 등으로 발표를 하지 않아 처음으로 비유클리드 기하학을 발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영예는 야노스 볼리아이이와 로바체프스키에게로 돌아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