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 예술의 부상 -중인층의 예술참여와 패트론의 역할변화

 1  조선후기 예술의 부상 -중인층의 예술참여와 패트론의 역할변화-1
 2  조선후기 예술의 부상 -중인층의 예술참여와 패트론의 역할변화-2
 3  조선후기 예술의 부상 -중인층의 예술참여와 패트론의 역할변화-3
 4  조선후기 예술의 부상 -중인층의 예술참여와 패트론의 역할변화-4
 5  조선후기 예술의 부상 -중인층의 예술참여와 패트론의 역할변화-5
 6  조선후기 예술의 부상 -중인층의 예술참여와 패트론의 역할변화-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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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조선후기 예술의 부상 -중인층의 예술참여와 패트론의 역할변화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1. 머리말
2. 본론
2.1. 조선후기 예술의 동향
2.2. 패트론의 예술과의 관계
2.2.1. 조선 전기 패트론
2.2.2. 조선 후기 패트론
3. 결론
본문내용
여기서 보이는 장교(長橋)에 사는 부자들은 상품의 유통이 활발하였던 시대적인 추세에 따라 급격히 부(富)를 축적한 신흥 서민 부자층이었을 것이다.
이렇듯 조선 후기에는 조선 전기 사대부들이 즐기던 예술의 문화를 즐기는 계층이 중인층으로까지 늘어났으며 문화를 즐기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이러한 예술의 발달에 기여하기도 하였다. 그 뿐 아니라 중인층은 서민층에서 성행하였던 예술문화를 한층 발전 시키는데에도 기여하였다. 이러한 예는 판소리와 탈춤에서 보여진다.

鳳山탈은 元來로 鳳山 吏屬들이 子子孫孫 世襲的으로 出演하여오던 것으로서 그中 醉發, 老僧, 初目 等의 役割은 吏屬中에도 가장 重要한 人物이 하고 上佐, 少巫, 通引 等의 年幼者로써 充當시켰는데 現今 이 탈놀이를 主宰하고있는 李東碧氏와 같은 이는 그의 二十代 先祖적부터 거의 世襲的으로初目의 役割을 擔當하여 왔다고 한다. 吳晴, “假面劇 鳳山탈脚本” 황해도탈놀이(서연호). 열화당, 1988, 110쪽.


이에 따르면 봉산탈춤은 그 주요 연희자가 향리, 곧 지방의 이서층 이서층 - 향리로 굳어짐, 각 관아에서 일하는 중인층 계층을 통칭하는 말
에게서 나왔음이 분명하다. 조선후기 탈춤의 부상에 있어서는 이렇듯 중인층의 문화참여가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2.2. 조선시대 패트론

2.2.1. 조선 전기 패트론

조선전기 궁중에서 행해지는 공연활동을 총체적으로 여악(女樂)이라 하며, 연회를 행하는 여자를 여기(女技)라 하여 궁중에서 음악과 춤을 담당하게 하였다. 이러한 여기는 조선 초기 신분층인 양반, 중인, 상민, 천민 중 대개가 천민계층에서 나왔다. 이러한 여기들의 활동은 조선의 제 10대 임금인 폭군 연산군(1498~1506) 때에도 이어졌으며 조선조의 가장 왕성한 조직으로 나타났다.

장악원 제조(掌樂院提調) 구수영(具壽永) 등에게 전교하기를,

“제조 2원(員)을 가설(加設)한 것은 예악(禮樂)을 위함이다. 국가가 태평하면 음악의 제도가 성려(盛麗) 성려(盛麗) : 성대하게 빛나다
해야만 하는데 전에 변변치 못한 무리가 말할 수 없는 일만 말하고 해야 할 일은 말하지 않으므로 이루지 못하였다. 이제 늦기는 하였으나 너희들은 내 뜻을 알아서 힘써 행해야 한다.”
하였다. 연산 11년 2월 17일 , 한국고전번역원


승정원에 전교하기를,
“음악이란 것은 나쁘고 더러운 것을 씻어 버리며 또한 시름을 풀기 위한 것이다. 기예(技藝)는 비록 첫째 가더라도 얼굴이 추하면 시름을 풀 수 없을 뿐 아니라 도리어 시름을 일으킬 따름이다. 옛적에 ‘뽑힌 여기(女妓)가 조연을 따른다[選妓隨彫輦]’ 하였으니, 만약 그 재주만을 취한다면 가기(歌妓) 가기(歌妓) : 노래에 능한 기생
라고 말했을 터이거늘, 어찌하여 반드시 뽑힌 여기라 하였겠느냐. 고르지 않아서는 안 됨이 분명하다. 대저 어전(御前)에 있을 사람을 어찌 얼굴이 추한 자를 쓰랴! 운평을 뽑음에는 더욱 잘 가려야 하리라.”
하였다. 연산 11년 6월 9일, 한국고전번역원


연산군은 흔히 폭정을 취한 폭군으로 시대에 기록이 되어 있지만 위에서 살펴본 예시에서 보다시피 궁중의 예악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예악의 발전에 기여했으나 여기의 선별에 있어서 재능보다도 얼굴을 따진점은 그의 예술적 후원인(일종의 패트론)으로서의 한계가 드러난다 볼 수 있다. 이 밖에도 연산군은 처용무에 관해서도 관심을 두었는데 이러한 점은 조선왕조 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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