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해안 방어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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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조선의 해안 방어체제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1. 머리말

2. 임진왜란기 까지의 조선의 지방군제

3. 조선의 대일관계

4. 조선의 수군

(1) 수군

(2) 함선

(3) 성곽

5. 맺음말

※ 참고문헌

본문내용
이러한 군익도체제는 세조 3년 10월에 진관(鎭管)체제로 바뀌게 된다. 진관체제는 주요한 지역인 거진을 중심으로 하여, 나머지 주변 지역의 제진(諸鎭)이 거진에 속하도록 한 것이다. 이는 전국적으로 개혁이 단행된 것이다. 이전에는 독진(獨鎭)이라 하여, 지역의 특수성이 감안된 진이 존재했고, 그 상하·소속관계가 불분명했던 것을 이 진관체제를 통해 극복하려 한 것을 보인다. 즉 거진을 상위적인 위치를, 나머지 제진(諸鎭)들이 하위 조직이 된 것이다.
또한 세조 4년에 각 병(兵)의 명칭의 통일을 어느정도 이루는 재조정이 나타나게 된다. 즉, 전국이 하나의 군사조직의 체제 안에 편입되도록 된 것이다.
이 체제의 군사 지휘체계를 살펴보자면, 주진(主鎭)의 각도 절도사→거진의 첨절제사→제진의 동첨절제사로 연결되는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수군의 경우에는 각 도의 수군 최고 지휘관인 수군절도사에서 전임수사·겸수사로 이어지는 체계였다.
진관체제라는 하나의 군사체계를 전국적으로 확립했다고는 하나, 전국 모든 지역에 무장한 군인을 상주(常駐)시킬 수는 없었다. 따라서 평상시에는 생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전략적으로 요충지에는 유방(留防)군이라는 것을 두어 항상 주둔시켰다.
이러한 진관체제 또한 한계점을 서서히 드러낸다. 진관체제라는 것이 너무 지나치게 광범위한 체제라 실제 유사시에는 그 실효성이 떨어지는 것이 큰 한계점이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제승방략(制勝方略)체제가 고안되었다. 이는 기존의 유사시에 진관들이 진관별로 자전자수(自戰自守)하는 것과 달리, 유사시에 각 읍의 수령이 소속 군사들을 이끌고, 본진을 떠나서 배정된 방어지역에서 중앙에서 임시로 파견되는 경장(京將)과 각 도의 병·수사의 지휘아래 공동 대처하는 것이다. 이 역시 1차 방어선이 무너질 경우, 2차 방어선이 없다는 문제점을 지닌다. 단적으로 임진왜란시기 이일의 패배가 이를 보여준다. 따라서 유성룡 등은 전쟁 도중 진관체제의 복구를 주장하기도 했다.
임진왜란 도중의 상황에서 진관체제의 복구는 현실상 어려운 것이었기에 다른 방안이 모색되었다. 그 방안으로 등장한 것이 중앙의 훈련도감 설치와 지방의 속오군(束伍軍) 편제였다. 속오(束伍)라는 것은 군사 배정 방안인데, 1사(司)는 5초(哨)를 통솔하고, 1초(哨)는 3기(旗)를, 1기(旗)는 3대(隊)를, 1대(隊)는 2오(伍)를, 1오(伍)는 단지 4명만을 거느리는 방식이었다. 이러한 속오군은 영장(營將)에 의하여 조련되었다. 즉 속오군체제는 많은 인원을 효율적으로 통솔, 지휘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는 체제였다. 그러나 이러한 속오군체제는 임진왜란기 마련되지만, 전쟁이 끝난 후 그 체제가 약해지다가 이후 이인좌의 난 이후 다시 재정비된다.


3. 조선의 대일관계

조선 외교정책의 기본은 사대와 교린이다. 명나라에게는 사대정책을 편 대신 왜(倭)·여진 등에게는 교린 정책을 실시하였다.
특히, 일본에 대해서는 소극적인 교린 정책을 펼쳤다. 일본이 먼저 적극적으로 접근해 오지 않는 한, 조선은 일본과 외교관계를 수립하려 하지 않았다. 이는 조선이 일본을 단지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한 회유와 교섭의 대상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위와 같은 기본적인 정책 기조는 임진왜란 전까지 지속되었다. 조선 초 태종 때 웅천을 개항하였고, 세종 때 삼포를 개항하였지만 일본은 대마도를 중심으로 하는 제한적인 무역을 허락한 조선은 일본과 외교관계에 있어 상국으로서의 입장으로 만족하는 정도였다. 하지만 고려 말부터 점차 커진 왜구의 위협은 대마도를 중심으로 조선 초기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이런 왜구의 위협에 조선은 강경책과 온건책으로 대응하였다.
참고문헌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23권, 탐구당, 2003.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29권, 탐구당, 2003.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30권, 탐구당, 2003.
한일관계사학회, 『한국과 일본, 왜곡과 콤플렉스의 역사』, 자작나무, 1998.
한일관계사학회, 『한일관계 2천년 보이는 역사, 보이지 않는 역사』, 경인문화사, 2006.
오붕근,『조선수군사』,한국문화사, 1998.
방상현,『조선초기 수군제도』, 민족문화사, 19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