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왕릉 레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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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조선의 왕릉 레포트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1. 왕릉의 개념 2) 국상 절차
2. 조선시대 이전의 왕릉 3) 왕릉의 구조와 양식
3. 조선시대의 왕릉 4) 왕릉의 관리
1) 왕릉의 분류와 종류 4. 조선시대 왕릉의 의미
본문내용
3. 조선시대의 왕릉

1) 왕릉의 분류와 종류
조선왕조 왕족의 무덤들은 모두 109기로 그 중 능(陵)이 44기 정확히 논하자면 폐위된 연산군과 광해군의 무덤은 묘(墓)로 하기에 42기 2묘이다.
, 원(園)이 13기 그리고 묘(墓)가 52기로 분류되어 있다. 이러한 분류는 위계에 따른 것이라 할 수 있는데, 계급사회였던 조선사회에서의 왕과 왕족은 죽어서 묻히는 무덤에서도 묻히는 자의 높낮이에 따라 그 명칭이나 그 규모와 배치되는 석물(石物)의 수가 다르게 조성되었던 것이다. 우선 능은 왕과 왕비의 무덤을, 원은 왕의 사친(私親)과 세자와 세자빈의 무덤을, 묘는 왕세자를 제외한 대군 ․ 공주 ․ 옹주 ․ 후궁 등의 무덤을 지칭한다.
능은 좌향(坐向)을 중요시하는데 좌(坐)란 혈의 중심이 되는 곳이고, 좌의 정면이 되는 방향이 향(向)이다. 왕릉의 좌향을 보면 대부분 북에서 남으로 향한 곳이 많고, 산세에 따라서는 서향 내지는 북향을 취한 것도 있기는 하다.
원과 묘는 봉분, 곡장, 상석, 정자각, 재실 등 대부분은 능과 같이 갖추고 있으나 왕릉보다는 규모가 작고, 봉분 밑에 병풍석과 난간석, 무인석이 생략되었다.
왕릉의 종류로는 단릉(單陵) 단릉(單陵)은 왕과 왕비 중 한 위(位)만 안장하여 봉분이 하나인 왕릉.
․ 쌍릉(雙陵) 쌍릉(雙陵)은 한 곡장(曲墻: 능침 주변에 동․서․북 3면에 두른 담장) 안에 왕과 왕비의 위를 좌우로 나란히 안장하여 봉분이 2기인 왕릉.
․ 합장릉(合葬陵) 합장릉(合葬陵)은 하나의 봉분 안에 왕과 왕비가 안장된 왕릉.
․ 삼연릉(三連陵) 삼연릉(三連陵)은 왕 ․ 원비 ․ 계비 등 3위를 한 곡장 안에 나란히 안장 3기의 봉분을 가진 왕릉.
․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은 한 능호 아래 왕과 왕비의 능을 정자각(丁字閣) 뒤쪽 좌우의 각기 다른 언덕에 단릉 처럼 조성한 왕릉.
등이 있으며, 이는 왕릉의 조성 형식에 따른 것으로 우상좌하(右上左下: 우측에 왕, 좌측에 왕비)를 보여준다.

2) 국상 절차
일반적으로 왕이 승하하면 국장(國葬)을 맡아 진행할 임시 기구들인 빈전도감(殯殿都監) 빈정도감은 국장이 났을 때, 장례일까지의 염습(殮襲), 성빈(成殯), 성복(成服) 등 빈전에 관한 일을 맡아보기 위하여 나라에서 임시로 세운 관청.
․ 국장도감(國葬都監) 국장도감은 재궁(梓宮), 거여(車與), 책보(冊寶), 복완(服玩), 능지(陵誌), 명기(明器), 길흉(吉凶), 의장(儀仗), 상유(喪帷), 포연(鋪筵), 제기(祭器), 제전(祭奠), 반우(返虞) 등 의식과 절차를 주관하던 임시 관청.
․ 산릉도감(山陵都監) 산릉도감은 왕이나 왕비의 능을 새로 만들 때 임시로 설치하던 관청으로 현궁(玄宮)과 정자각(丁字閣), 비각(碑閣), 재실(齋室) 등 왕릉조성과 부대시설에 관한 일을 맡았던 관청.
을 설치하고 장례 준비를 했다.
우선 왕이 묻힐 곳을 정하는 택지(擇地)를 하게 되는데, 이때 동원된 여러 명의 풍수지관들과 함께 대신들은 한양 주변 백리 안팎의 명당자리를 찾아다니면서 풍수로써 판단하여 능지(陵地)를 천거하면, 조정에서 논의를 거친 뒤에 새로 등극한 왕의 재가를 받아 결정했다. 능지를 정하는 것은 선왕이 영면할 곳을 정하는 아주 중요한 문제였으므로 왕이 친히 현지에 거둥하여 답사하기도 했다.
택지된 왕릉 터는 고려 왕릉의 경우와 같이 풍수사상에 영향으로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조건을 만족시켜야 했는데, 배산임수의 조건이란 북쪽의 주산(主山)을 뒤로 업고, 그 중허리에 봉분을 이룩하며, 좌우에 청룡과 백호의 산세를 이루고, 왕릉 앞쪽으로 물이 흐르며, 남쪽으로는 멀리 안산(案山)을 바라보는 명당에 자리 잡는 것이 표준형이다.
이처럼 왕릉의 택지가 이루어지면 능역을 조성하는 작업을 하는 데 이때 동원된 인원만도 6,000명에서 9,000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즉 왕릉의 택지와 능역 조성 작업은 당시에 대략 3개월에서 5개월이 소요되었으며, 거대한 인원과 물자가 소요되는 국사(國事) 중의 하나로 중요시 되었다. 국장 절차가 수 개월 동안 소요되었던 이유는 왕릉 택지에 관한 풍수 논쟁 때문이었다. 왕릉 발복을 믿고 있던 조선왕조는 왕릉 발복이 용상 발복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신봉하였기에, 왕릉을 명당에다 택지케 하고, 심지어 역적 무덤은 파버리기까지 했다. 그렇기에 왕릉 택지는 신중에 신중을 기하여 이루어졌던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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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일, 『조선의 왕릉』, 가람기획,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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