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학] 도갑사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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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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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도갑사소개

2. 도갑사연혁

3. "도갑사가 낳은 대선지식 도선국사"

(1) 도선국사의 이름과 호

(2) 당시의 사회상

(3) 탄생과 설화

(4) 열반설화

(5) 출가에서 열반까지

(6) 옥령산문과 도선국사

(7) 도갑사의 국보와 보물 및 문화재

본문내용
도갑사는 월출산 남쪽 도갑산(해발 376m)을 등지고 주지봉을 바라보는 넓은 산자락에 자리잡은 도량으로 신라말 헌강왕6년 도선국사에 의해 창건되었다. 현재 고려시대의 기록은 자료 유실로 알려진 것이 없고 조선 이후의 발자취는 소상히 남아 전해 내려오고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사원의 중창은 1456년(세조2년) 수미(守眉)왕사에 의해서였다.수미왕사는 왕실의 어명을 받들어 국가적 지원으로 966칸에 달하는 당우와 전각을 세웠고,부속 암자만 해도 상동암, 하동암, 남암, 서부도암, 동부도암, 미륵암, 비전암, 봉선암,대적암, 상견암, 중견암, 하견암 등 12개암자가 있었다고 한다.

사원중창은 그 후로도 계속 진행되었는데 '억불숭유'의 열악한 사회적 여건속에서 도대규모의 중창불사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도갑사가 불교계는 물론 사회 전반에 걸쳐 얼마나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는가를 충분히 짐작케 한다. 1653년(효종4년)에는 '도선수미비'와 '월출산도갑사석교 중창비'가세워졌는데, 당시영의정과 형조판서 등 국가의 지도급 인사들이 비문을 짓고 글씨를 쓴 것으로 보아 그 당시 도갑사의 위상을 엿볼 수 있게 한다.

그 후로도 사원의 중수는 계속 이어져 1677년(숙종3년)에는 당간석주를 세웠고, 1682년에는 대형 석조(石槽)를 조성하였다. 18세기 중엽에는 연담 유일 스님이 이곳에 머물면서 당시 불교사전이라 할 수 있는 '석전유해'를 편찬하였다. 그런데 19세기 이후의 연혁은 알려진 것이 거의 없고, 정유재란,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많은 문화재가 유실되었으며, 그나마 남아있던 것들도 일제시대와 6.25전란을 겪으면서 소실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