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주의와정체성] 제주도 상장례 문화에 대한 예비적 검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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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민족주의와정체성] 제주도 상장례 문화에 대한 예비적 검토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I. 서론
II. 유교문화의 전래와 상장례 전통의 수립
1. 관혼상제 전통의 수입과 전파
2. 제주도에 유교문화 전래 과정
3. 유교문화의 확산
4. 조선시대 제주도 장례문화 사례
III. 제주도 상장례 문화
1. 영혼관과 내세관
2. 상장례에 반영된 종교적 요소들
3. 제주도 상장례 문화의 특성
4. 제주도 상장례 사례
IV. 결론

본문내용
1. 관혼상제 전통의 수입과 전파
조선 정부는 유교를 통치이데올로기로 채택하고, 그에 따른 부수적인 제반 통치수단들을 만들어 가기 시작하였다. 중국 송나라의 주자(朱子)가 만든 주자학(朱子學)을 받아들여 조선정부는 그것을 더욱 발전시켜 새로운 통치이념으로 정립시키는 한편, 생활원리로서 유교를 전파시켜 나갔다. 하지만 조선 초기에는 유교는 양반층의 전유물이었으며, 일반 대중들에게까지 전파되지는 않았다. 엄격한 신분질서를 유지시키면서 양반층에서는 체계적인 교육과 과거제도를 통하여 신분유지와 권력집단을 재생산하면서 지배체제를 공고히 하였다.
그러나 생활원리로서의 유교를 실천하는 구체적인 수단인 가례는 조선사회와는 맞지 않은 부분이 있어서 당시의 지식인들은 관혼상제의 전통을 새롭게 만들어서 적용하였다. 중국의 『주자가례(朱子家禮)』(1169년)는 1290년(고려 충렬왕 16) 안향(安珦)에 의해 도입되었고, 1389년(고려 공양왕2) 통치이념으로 성리학이 채택되었으며, 일생의례의 기준이 되었다. 『주자가례(朱子家禮)』를 받아들였지만 가례(家禮)의 내용이 매우 복잡하고 까다로와 일반서민들이 그것을 그대로 시행하기란 지극히 어려운 일이었다. 또한 양반계층에서는 신분 차별의 문화를 유지하면서 철저히 지배와 피지배 문화를 구분하려고 하였으며, 이에따라 일반 서민들이 유교식 문화를 학습하거나 시행할 수는 없었다.
조선 사회는 임진왜란(16세기말)과 병자호란(17세기 중엽)으로 이어지는 장기간의 전란으로 인하여 사회체제가 변화를 겪게 된다. 사회계층의 최하위 기반을 담당하고 있던 노비계층이 축소되면서 노비제는 유명무실하게 되었고, 1801년 공노비제도 폐지를 가져오게 된다. 또한 양반계층이 농촌의 토착세력으로 자리를 잡고, 중인 및 상민계층에서 양반계층으로의 편입이 증대되는 등 양반 신분질서 자체가 근본적으로 붕괴되어가기 시작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급격하게 변화하는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수단으로 조선정부는 예치(禮治)를 더욱 더 강조하여 시회 기강을 유지하려고 노력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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