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제철 설립 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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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포항제철 설립 정책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1. 포항제철 건설을 위한 정부의 노력 및 박태준의 활약과 자금마련


2. 포항제철의 연혁


3. 포항제철의 성장


4. 박태준 회장의 창업정신


5. 포항제철의 기업이념


6. 박태준의 힘


7. 마무리 하며


본문내용
KISA는 1967년 1월과 3월에 잇달아 총회를 열고 제철소 규모와 자금 동원 등에 대한 논의를 계속했다. 대표단이 방한해 타당성 조사도 벌였다. 그리고 4월 6일, KISA 대표 포이 회장과 장기영 부총리가 ‘종합제철 건설 가 협정’을 체결했다. 조강 기준 100만 톤 규모로, 두 차례로 나누어 1970년과 1976년에 각각 50만 톤 규모의 제철소를 건설한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기대치에 훨씬 못 미치는 것이었다. 곧바로 기본협정을 체결하지 못하고 7월로 미룰 수밖에 없는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기본협정까지는 산 넘어 산이었다. 조강규모, 건설자금, 각종 조건 등 밀고 당기는 교섭이 계속됐다. 예정 기한인 7월을 훨씬 넘겨 10월 초에야 개괄적인 합의가 이루어졌다.
1967년 10월 20일, 마침내 KISA와 우리 정부 사이에 ‘종합제철 건설에 관한 기본협정’이 체결됐다. 전문 45개 조. 조강 60만 톤 규모의 제철소를 1972년 9월에 완공하며, 300만 톤급 확대를 전제로 설계하기로 돼 있었다. 건설자금은 1억 3,070만 2,000달러(외자 9,570만 2,000달러 / 내자 3,500만 달러). 실수요자는 대한중석이라는 사실도 명시됐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자금조달 부분이 모호하게 처리돼 있었다. 주로 기술용역에 초점을 맞춘 것이었다. KISA 회원사들의 책임이 명확하지 않았다. 자금규모와 조달시기, KISA 회원사들 사이의 지원자금 배분 문제 등이 명시되지 않은 채, 차관 확보를 지원한다는 애매한 문구뿐이었다. KISA 회원사들을 법적으로 구속할 수 있는 조항은 전혀 없었다. 뿐만 아니라 기본설계 후 한국정부와 KISA가 자금조달을 위해 협력하되, 여의치 않으면 상호 아무런 책임 없이 자동 해약하게 돼 있었다. 제일 먼저 이 부분을 지적한 것은 박태준 사장이었다. 그러나 정부는 협정체결이라는 성과에 지나치게 급급했다.
결국 우려는 현실로 나타났다. 우선 1년 넘게 KISA와 별 소득없는 지리한 협상이 이어졌다. 외자 1억 900만 달러 중 도입이 확정된 것은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를 합해 4,300만 달러에 그쳤다. 미국과 서독은 차관공여를 기피하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같은 해 11월, 최악의 상황이 벌어졌다. 차관공여 주체인 미국 수출입은행이 세계은행(IBRD)에 한국정부의 차관요청에 대한 심사를 의뢰했으며, IBRD는 한국의 종합제철사업에 비관적인 전망을 내놓은 것이다. KISA는 곧바로 IBRD의 전망에 반응을 보였다. IBRD 보고서 내용을 인용하면서 한국의 제철소는 경제적 타당
참고문헌
경영사례연구, 2001, 오종석 외 2명, 학현사
누가 새벽을 태우는가, 1992, 이호, 자유시대사
철강공업육성법, 2006, 이창운, 국가기록원
포스코박물관 (http://musenm.posco.co.kr/)
포스코 (http://www.posc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