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사] 해방직후 농민의 민의결집 -전국농민조합총연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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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경제사] 해방직후 농민의 민의결집 -전국농민조합총연맹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1. 서언
2. 해방직후 농민운동의 고양
3. 전국농민조합총연맹의 성립
4. 전국농민조합총연맹의 활동
5. 결어
본문내용
3. 전국농민조합총연맹의 활동


(1) 3ㆍ7제 소작료 운동

해방직후 권력의 공백기 동안 나타났던 농민들의 산발적이고 폭력적으로 나타났던 농장자주관리 움직임과 소작료 불납ㆍ인하 움직임이 건준지부와 인민위에 의해 수습되어 가고 있었다. 예상치 못했던 농민들의 폭발적인 혁명 열기를 목도한 조선공산당은 농민대중을 포섭하여 당의 대중적 지지 기반을 넓혀가고자 하였다. 박헌영은 〈8월 테제〉를 발표하여 ‘토지를 몰수하여 농민에게 나누어주며, 일체의 봉건주의적 잔재를 청산하는 투쟁과 그들의 일상이익을 대표하는 요구조건을 결부하여 농민대중운동을 전개함으로써 농민과 통일전선을 결성하고 농민을 전취하여야 한다.’고 당면 운동의 과제를 제시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과제의 실현을 위하여 ‘지주ㆍ고리대금업자ㆍ금융조합ㆍ은행에 대한 농민의 일체 부채의 무효화, 소작료의 3ㆍ7제 금납화 및 소작관계에 있어서의 봉건적 잔재 일소’ 등에 주력해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조선공산당은 1945년 10월 3일 조선공산당중앙위원회의 〈토지는 농민에게 적정분배-조선공산당의 토지문제에 대한 결의〉를 통해 보다 구체화된 농민운동 방침을 정하였는데, ‘일본제국주의자와 민족반역자의 토지를 몰수’하여 ‘몰수된 토지는 토지 없는 토지 적은 농민에게 분배하되 관리권은 한시적으로 농민위원회나 인민위원회에서 행사’할 것을 제시하고, 당면투쟁요구로서 ‘소작료의 3ㆍ7제 및 금납화와 소작료인하투쟁’을 지시하였다. 김남식, 「박헌영과 8월테제」, 『해방전후사의 인식』2, 한길사, 1985, p.110, pp.123~125
국민의 70%가 농민인 식민지반봉건의 조건에서 반제반봉건투쟁의 중심과제는 토지문제의 해결에 있으며, 현재의 조건은 직접적인 토지 개혁 단계가 아니라 3ㆍ7제 운동을 통하여 다음 단계의 요구에 농민들이 자신을 갖게 하고 용기를 굳게 하여 투쟁역량을 집중하는 단계라고 인식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몰락한 중소지주에게도 그 생활을 보장해주어 그들로 하여금 민족통일전선에 혼연히 참여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것이 3ㆍ7제 소작료 운동의 또 하나의 이유였다. 견수찬, 위의 글, p.15
일부 지역의 경우 2ㆍ8제나 소작료 불납이 여전히 주장되기도 하였으나, 3ㆍ7제 소작료 운동은 대부분의 농민대중에게 받아들여졌으며 3ㆍ7제 소작료 운동의 과정에서 농민조합의 결성 및 기존 농민조합으로의 개편이 진행되었다.
조선공산당이 농민대중으로부터의 지지를 확보해가기 시작하자, 미군정은 1945년 10월 5일 법령 제9호로서 3ㆍ1제 소작제를 공포 법령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압제적인 소작료와 기존 계약에 따라 소작들이 지불해야 될 금리는 준노예적 상태와 군정이 목표하는 바 보다 낮은 생활수준을 초래하고 있기 때문에 이에 한국에서의 국가적 비상사태를 선포하는 바이다. 어떠한 소작인이 어떤 사람에게 지불하는 현물, 현금 혹은 어떠한 지불 가능한 형태이든간에 그 최고 지불한도는 이제부터 어떠한 소작인에 의해서 경작되고 그 후에 누구에 의해 수확되었든 간에 경작된 곡물, 농산품 및 과일의 3분의 1을 초과해서는 안된다.”
함으로써 농민들의 소작여건 개선의 열망을 반영하면서도, 궁지에 몰리고 있는 지주세력의 지위를 회복ㆍ강화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미
참고문헌

사료
◦ 민전사무국편,『조선해방연보』, 민주주의민족전선 사무국, 文友印書館, 1946
◦ 김윤희 외, 『통계로 본 한국근현대사』, 아연출판부, 2004
◦ 김남식, 『남로당연구 자료집』제1집,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1974


연구서
◦ 이우재, 『한국농민운동사연구』, 한울, 1991
◦ Bruce. Cumingsㆍ김자동 옮김, 1986,《한국전쟁의 기원》제3부, 일월서각

논문
◦ 김남식, 「박헌영과 8월테제」, 『해방전후사의 인식』2, 한길사, 1985
◦ 박혜숙, 「미군정기의 농민운동과 전농의 운동노선」, 『해방전후사의 인식 3』, 한길사, 1987
◦ 이혜숙, 「해방직후 ‘전농’의 농민운동」, 『말 1989/05』, 월간말, 1989
◦ 최정미, 「미군정기 한국좌익의 농민운동에 관한 연구」, 경희대 석사, 1990
◦ 최봉대, 「미군정의 농민정책에 관한 연구」, 『경제와 사회 94년 겨울호』, 1994
◦ 견수찬, 「해방직후 전국농민조합총연맹의 주도세력과 운동노선」, 인하대 석사, 1997

◦ 김동만, 〈제주지방 건국준비위원회, 인민위원회의 조직과 활동〉, 《역사비평 계간12호》 (봄)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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