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예술] `爾` VS `왕의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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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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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목 차
1. 작가정보

2. 작품의 시대적 특성, 배경
1) 폐비 사건의 배경과 윤씨의 사약

2) 연산군의 성격을 나타내는 어린 시절의 일화들

3) 연산군의 집권과 초기의 통치

4) 연산군의 폭정과 몰락, 그리고 폐출

3. 작품의 줄거리

‘왕의 남자’

4. ‘爾’ VS ‘왕의 남자’

1) 영화의 제목, 이(爾) = 왕의 남자

2) 스토리 전개의 비교
연산을 사이에 둔 공길과 녹수 VS 공길을 가운데 둔 장생과 연산

연산군의 비극적 삶과 사랑 VS 신명나는 한판 마당놀이

3) 등장인물, 성격의 비교
도발적인 매력, 공길

자유에 목마른 장생

사랑에 굶주린 폭군 연산

가장 솔직한 욕망, 녹수

4) 무대와 스크린, 장르의 비교


본문내용

2) 연산군의 성격을 나타내는 어린 시절의 일화들
(1) 성종이 어느 날 세자를 불러놓고 임금의 도리에 대해 가르치려 할 때였다. 부왕의 부름을 받고 온 융(연산군)이 성종에게 다가가려 할 때 갑자기 사슴 한 마리가 달려들어 그의 옷과 손등을 핥아대자 자신의 옷을 더럽힌 것에 격분한 나머지 부왕이 보는 앞에서 그 사슴을 발길로 걷어찼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성종은 몹시 화가 나서 융을 꾸짖었고, 성종이 죽고 나서 왕위에 오른 연산군은 가장 먼저 그 사슴을 활로 죽여버렸다.
(2) 융에게는 허침과 조자서 두 명의 스승이 있었는데, 조자서는 엄하고 깐깐한 것에 비해 허침은 너그럽고 포용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 당시 융은 장난기가 많은 아이로 자주 수업시간을 비우기도 했는데 이 때문에 조자서는 그 사실을 상감에게 고해바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고 허침은 웃으며 부드럽게 타이르곤 했다. 어린 세자가 조자서를 싫어하고 허침을 좋아한 것은 당연했다. 그래서 하루는 벽에다가 ‘조자서는 대소인배요, 허침은 대성인이다’라 낙서를 해놓기도 했다. 그리고 융은 단순히 이 낙서에만 그치지 않고 자신이 왕위에 오르자 조자서를 가장 먼저 죽였다.

3) 연산군의 집권과 초기의 통치
1494년 12월 왕위를 계승한 연산군은 적어도 무오사화(1498)를 겪기 전까지는 우리가 흔히 아는 폭군의 모습이 아니었다. 즉위 초에는 성종조의 평화로운 분위기가 그대로 이어졌고 인재가 많았던 덕분에 민간은 질서를 유지하고 있었다. 연산군이 즉위한 이후 4년간의 치세는 오히려 성종조 말기에 나타나기 시작했던 퇴폐 풍조와 부패상을 일소하는 기간이었다. 등극 6개월 후에는 전국 모든 도에 암행어사를 파견하여 민간의 동정을 살피고 관료의 기강을 바로 잡았다. 또한 인재를 확충하기 위해 별시문과를 실시하여 33인을 급제시키고 변경 지방에 여진족의 침입이 계속되자 귀화한 여진인으로 하여금 그들을 회유케 하여 변방 지역의 안정을 꾀하기도 하였다. 문화 정책 면에서도 문신의 사가독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