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화기시대의 선구자적 여성 최송설당

 1  개화기시대의 선구자적 여성 최송설당-1
 2  개화기시대의 선구자적 여성 최송설당-2
 3  개화기시대의 선구자적 여성 최송설당-3
 4  개화기시대의 선구자적 여성 최송설당-4
 5  개화기시대의 선구자적 여성 최송설당-5
 6  개화기시대의 선구자적 여성 최송설당-6
※ 미리보기 이미지는 최대 20페이지까지만 지원합니다.
  • 분야
  • 등록일
  • 페이지/형식
  • 구매가격
  • 적립금
자료 다운로드  네이버 로그인
소개글
개화기시대의 선구자적 여성 최송설당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개화기시대의 선구자적 여성, 최송설당
1. 서론
최송설당은 시대의 선구자로서, 시인으로서, 교육자로서, 송설당은 1900년대 초기 한국사, 특히 한국여성사에서 중요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근대화 과정에서 여성의 역할이 어떻게 변화 했으며 작품속에서 어떻게 그려지는지 송설당의 생애와 가사 작품을 통해서 알아보도록 하자.
2. 송설당의 생애
최송설당은 1855년(철종6년)8월 29일 현재의 김천시 문당동에서 가난한 서당의 훈장이었던 최창환과 부인 정씨 사이에 아들은 없고 맏딸로 태어났다. 송설당의 조상은 평안도에서 이름난 집안이었으나 증조부의 외가에서 홍경래의 난에 가담했다는 이유러 관련되어 감옥에 갇혀 억울하게 죽었다. 조부는 전하도의 고부로 귀양을 가서, 1847에 죽었다. 1861년부터 1870년까지 서당훈장이었던 아버지께 한글과 한문을 배웠다. 송설당은 그때부터 글을 지을줄 알았다. 1866년 바아버지가 조상의 한을 풀지못하고 세상을 떠나자, 조상의 억울한 누명을 벗기고 집안의 명예를 회복하려고 재력을 모으기로 결심하여 근검절약 저축으로 자수성가의 기틀을 닦았다.
송설당이 39세가 되는 1894년 3월에 서울 누룩골에 올라와 결혼도 포기한 채 불교로 귀의했다. 1897년 엄비(고종의 계비)와 사귀다가 궁궐에 들어가 공종황제의 왕세자인 영친왕의 보모가 되었다. 1901년에 조상들의 억울한 누명을 벗기고 서울 무교동 94번지에 정착했다. 많은 수입이 생기자 1911년부터 1912년 까지 김해에다 토지 500석을 사들여 대지주가 되어Ty 전국 30여개의 절을 찾아 불공을 드리며 불심을 돈독히 하기도 하였다. 1914년에는 김천 교동 주민에게 벼 50섬을 희사하고 조상의 묘를 찾아 수축하였다. 1917년에 세상을 떠난 어머니의 유언인 “깨끗한 재산을 육영 사업에 쓰라” 는 말에 돈을 모았다. 같은 해에 김천공립보통고등학교와 금릉유치원 및 금릉 학원에 많은 돈을 기부하였다. 이런 육영사업이 알려지자 조선총독으로부터 상을 받았다. 1922년 「최송설당집」을 3권 3책으로 발행하였다(1권 한시, 2권 한글가사 3권 부록). 1930년 2월에 언론에 학교설립을 위해 전재산 30만 2천 1백원을 희사한다는 성명서가 발펴되었다. 이 해 김천보통고등학교후원회가 조직 되었다. 1931년 2월 5일, 재단법인 송설당교육재단 인가되었다. 5월 9일이 개교기념일이다. 1935년, 자신의 동상을 건립했다. 1939년 6월 16일, 향년 84세로 “길이 사학을 위하고 민족정신을 함양하라. 잘 교육받은 학생 한 사람이 동양을 진압할 수 있다. 이길을 따라 지키되, 내 뜻은 져버리지 말라” 는 유언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훗날, 1963년 8월 15일, 대한민국 대통령으로부터 문화포상 받았다.
3. 문학을 통해서 본 송설당
문집의 2권ㄴ에 실려있는 50편의 가사 작품을 제재를 기준으로 삼아 대체적으로 분류하면 자연물이 21편으로 가장 많고, 그 다음으로는 술회가 15편, 가문이 9편, 기행유람이 5편이다. 제재를 기준으로 송설당에 대해서 말하고자 한다.
3.1. 자연
자연물을 예찬한 가사는 21편이나 된다. 특히 동, 식물을 자연환경 등, 하찮다고 여겨질 곤충까지 여성 특유의 미세한 표현과 섬세함으로 문학적으로 표현되었다. 그 중에서도 송설당의 가사중에서 최초로 나오는 작품인 「창숑(蒼松)」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무러보세 무러보세 울울함만 저창숑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