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학 고대의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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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교육학 고대의 교육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교육철학 및 교육사


고대의 국가는 철기 문화의 보급과 이에 관련하여 생산에 따른 증대를 토대로 여러 소국 중 우세한 집단의 족장이 왕이 되는 연맹왕국이 이루어졌다. 이 연맹왕국의 왕은 자기 집단 내부의 지배력을 강화하는 동시에 다른 집단의 지배력을 키워 나아갔고, 이러한 과정에서 주변 지역을 활발하게 정복하여 영역을 확대하고, 정복과정에서 성장한 경제력과 군사력을 바탕으로 왕권을 더욱 강화시켜 나아갔는데 이렇듯 왕권이 강화되면서 율령을 반포하여 통치체제를 정비하였고, 집단의 통합을 강화하기 위하여 불교를 받아들여 형성된 것이다.
이렇게 발전하게 된 고구려, 백제, 신라, 즉, 삼국은 고대 국가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주변의 소국과 전쟁을 벌여 정복한 지역에는 그 지역의 지배자를 내세워 토산물을 공물로 수취하였다. 또, 삼국은 전쟁 포로를 귀족이나 병사에게 노비로 나누어 주기도 하고, 군공을 세운 사람에게 일정지역의 토지와 농민을 식읍으로 주었다. 삼국은 중앙 집권체제를 정비하면서 조세제도라는 것을 마련하였다. 조세는 대체로 재산의 정도에 따라 호를 나누어 곡물과 포를 거두었으며, 그 지역의 특산물도 거두었다. 왕궁, 성, 저수지 등을 만드는 데에 노동력이 필요하면 국가에서 만 15세 이상의 남자를 동원하였다. 아울러 농민경제를 안정시키기 위하여 농업 생산력을 높일 수 있는 시책과 구휼 정책을 시행하였다. 철제농기구를 농민에게 보급하여 소를 이용한 우경을 장려하고, 황무지 개간을 권장하여 경작지를 확대하였으며, 저수지를 만들거나 수리하여 가뭄에 대비하였다. 삼국시대에는 농업생산력의 수준이 낮아 수도 같은 도시에서만 시장이 형성되었다. 신라는 5세기 말 경주에 시장을 열어 물품을 매매하게 하였고, 6세기 초 시장을 감독하는 관청인 동시전을 설치하였다. 이때의 농민들은 자기소유의 토지를 경작하거나 부유한 자의 토지를 빌려 경작하였는데 그 당시에는 대부분의 토지에서 계속 농사짓지 못하고 1년 또는 수년 동안 묵혀 두어야 했으며 농민은 스스로 농사 기술을 개발하고, 계곡 옆이나 산비탈 등을 경작지로 바꾸어 농업 생산력을 향상시켰다. 그러나, 자연 재해를 당하거나 고리대를 갚지 못하는 경우에는 몰락하여 노비, 유랑민, 도적이 되기도 하였다.
또한 여러 부족이 통합되는 과정에서 고대 사회에서는 지배층 사이에 위계서열이 마련되었고, 그 서열은 신분제도로 발전이 되었다. 신분구성은 왕족을 비롯한 귀족, 편민, 천민으로 크게 구분되며 지배층은 특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율령을 만들었고, 개인의 신분은 능력보다는 그가 속한 친족의 사회적 위치에 따라 결정되었다. 삼국에서는 왕족을 비롯한 옛 부족장 세력이 중앙의 귀족으로 재편성되어 전치 권력과 사회, 경제적 특권을 누렸다. 평민층은 대부분 농민으로서 자유민이었으나,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많은 제약을 받았다. 이들은 나라에서 부과하는 조세를 납부하고 노동력을 징발 당하였기 때문에 대부분 생활이 어려웠다. 천민의 대부분인 노비는 왕실과 귀족 및 관청에 예속되어 신분이 자유롭지 못하였다.
또한 우리나라는 철기 시대부터 한자를 도입하여 사용해 왔지만, 이두나 향찰을 만들어 한문의 토착화를 위한 독자적 노력도 기울였다. 이러한 한자의 보급과 함께 교육기관이 설립되었다. 고구려는 수도에 태학을 세워 유교경전과 역사서를 가르치고, 지방에는 경당을 세워 청소년에게 한학과 무술을 가르쳤다. 백제는 5경 박사와 의박사, 역박사 등을 두어 유교 경전과 기술학 등을 가르쳤다. 임신서기석을 보면 신라에서도 청소년이 유교 경전을 공부하였던 사실을 알 수 있다.
중국과의 교류가 활발해지고 여러 교육 기관이 설립됨에 따라 유학이 보급되어갔다. 삼국 시대의 유학은 학문적으로 깊이 있게 연구된 것이 아니라 충, 효, 신 등 도덕규범을 장려하는 정도였다.
삼국 시대에 학문이 점차 발달하고 중앙 집권적 체제가 정비됨에 따라 연사 편찬이 이루어졌다. 고구려에서는 일찍부터 유기가 편찬되었으며, 영양왕 때 이문진이 이를 간추려 신집 5권을 편찬하였다. 백제에서는 근초고왕 때 고흥이 서기를, 신라에서는 진흥왕 때 거칠부가 국사를 편찬하였다. 그러나 이들 역사서는 모두 전하지 않고 있다. 삼국 통일 이후, 신라의 대표적 문장가인 김대문은 화랑의 전기를 모은 화랑세기. 유명한 승려의 전기를 모은 고승전, 한사누지방의 지리적인 한산기 등을 지었다. 그의 저서는 신라의 문화를 주체적으로 인식하려는 경향을 보여 주고 있다.
삼국은 중앙 집권 체제의 확립과 지방 세력의 통합에 힘쓰던 4세기에 불교를 수용하였다. 이는 새로운 국가 정신의 확립에 기여하고 강화된 왕권을 이념적으로 뒷받침해 주는 사상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신라의 여러 왕이 불교식 이름을 가졌으며, 원광은 젊은이들에게 세속 5계를 가르쳤다. 또, 불교의 전래와 함께 사상을 비롯한 음악, 미술, 건축, 공예, 의학 등 선진 문화도 폭넓게 수용되었다. 불교는 새로운 문화 창조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삼국은 불교를 신앙으로 널리 수용하였는데, 고구려와 백제에서는 사상적으로 불교를 이해하는 데에도 상당히 높은 수준이었다. 특히, 신라에서는 불교가 왕권과 밀착되어 성행하였다. 신라에서는 사람의 행위에 따라 업보를 받는다는 업설과, 미륵불이 나타나 이상적인 불국토를 건설한다는 미륵불 신앙이 널리 받아들여졌다. 삼국에는 도교도 전래되어 산천 숭배나 신선사상과 결합하여 귀족 사회를 중심으로 환영을 받았다. 백제의 산수무늬 벽돌은 자연과 더불어 살고자 하는 사람들의 생각을 담고 있으며, 백제 금동 대향로는 신선들이 사는 이상 세계를 현상으로 표현하였다. 고구려 고분에 그려진 사신도는 도교의 방위신을 그린 것으로, 죽은 자의 사후 세계를 지켜 주리라는 믿음을 표현하고 있다.신라의 불교 사상은 고구려와 백제의 문화를 종합하여 한민족 문화의 토대를 마련한 7세기 후반기에 정립 되었다. 삼국 불교의 유산을 토대로 하고 중국과의 교류를 더하여 신라 불교는 다양하고 폭넓은 불교 사상을 본격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기반을 쌓았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원효는 불교 서적을 폭넓게 이해하고, 모든 것이 한마음에서 나온다는 일심 사상을 바탕으로, 다른 종파들과 사상적 대립을 조화 시키고 분파의식을 극복하려고 노력하였다. 의상은 모든 존재가 상호 의존적인 관계에 있으면서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화엄 사상을 정립하였다. 의상은 화엄 사상을 바탕으로 교단을 형성하여 많은 제자를 양성하고, 부석사를 비롯한 여러 사원을 건립하여 불교문화의 폭을 확대하였다. 원효는 극락에 가고자 하는 아미타 신앙을 자신이 직접 전도하며 불교 대중화의 길을 걸었고, 의상은 아미타 신앙과 함께 현세에서 고난을 구제받고자 하는 관음신앙을 이끌었다. 이 시기부터 불교는 일반인에게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때에 많은 승려가 중국에 가서 새로운 불교를 전수해왔다. 중국을 넘어 인도까지 가서 불교를 공부하고 오는 승려도 있었다. 그 중에 혜초는 자신이 돌아본 이도와 중앙아시아 여러 나라의 풍물을 생생하게 기록한 왕오천축국전을 남겼다.
신라 말에는 경전의 이해를 통하여 깨달음을 추구하는 교종과 달리, 실천 수행을 통하여 마음 소게 내재된 깨달음을 얻는다는 선종불교가 널리 확산되었다. 선종은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고자 하는 지방 호족의 이념적 지주가 되었으며, 신라 말기의 선종 승려들은 중국에서 유행한 풍수지리설을 들여왔다.
이뿐 아니라 고대의 천문학은 천제 관측을 중심으로 발달하였는데 고구려에는 별자리를 그린 천문도가 만들어졌고, 신라에는 7세기 선덕여왕 때에 첨성대를 세워 천체를 관측 하였다. 고대 시대에는 천문현상에 관한 학문을 중요시하였는데 이는 농업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인식하였고 아울러 왕의권위를 하늘과 연결시키려고 하였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