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부흥운동의 원인과 발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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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백제 부흥운동의 원인과 발단-2
 3  백제 부흥운동의 원인과 발단-3
 4  백제 부흥운동의 원인과 발단-4
 5  백제 부흥운동의 원인과 발단-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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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백제 부흥운동의 원인과 발단-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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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백제 부흥운동의 원인과 발단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백제 부흥운동의 원인과 발단
- 목차 -
Ⅰ. 들어가는 말
Ⅱ. 백제의 멸망과 당의 지배
Ⅲ. 백제 부흥운동의 원인
1. 백제인들의 패망 부정
2. 당나라의 약탈과 지배
3. 신라의 차별
4. 흥망계절의 사상
5. 세력 보존의 필요성
Ⅳ. 나가는 말
Ⅰ. 들어가는 말
의자왕 24년(660) 백제는 나당연합군에 의하여 결국 멸망을 하고 만다. 의자왕은 소정방과 무열왕에게 굴욕적인 화평을 구걸하였고 그 강화의 순간마저도 자신의 부장에 의하여 반강제적으로 끌려나온 것이었다. 의자왕의 항복에 대하여 『舊唐書』에서는 “대장 이식이 의자를 거느리고 와서 항복하였다”고 하고 『新唐書』에서도 “장군 이식이 의자왕과 함께 항복하였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의자왕보다 웅진방령장군인 이식의 이름이 먼저 나오는 것에 관하여 사세가 어려워지자 이식이 의자왕을 사로잡아 항복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노중국, 「백제멸망후 부흥군의 부흥전쟁연구」, 『역사의 재조명』, 소화, 1995, p,196.)
이로써 약 600년에 걸친 백제왕조는 그 종지부를 찍었다. 그러나 백제의 왕조가 종지부를 찍었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백제라는 정신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의자왕 24년(660) 5개의 도독부가 설치되고 같은 해에 귀실복신을 비롯하여 승려인 도침이나 흑치상지등이 백제의 부흥을 외치며 거병을 한 것이다. 이에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를 제외한 4개의 도독부가 사실상 효력을 가지지 못하고 소멸하고 말았다. 이후 부흥군은 사비성에 주둔한 유인궤의 백제도호부를 포위 공격했으며 신라와 당의 연합을 막기 위하여 목책을 설치하기도 하는 등 소기의 성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이렇게 백제의 멸망 이후 약 4년간 백제의 정신은 부흥군이라는 이름하에 여전히 살아있었다. 여기에서는 이렇게 부흥군이 거병하고 강렬하게 싸울 수밖에 없었던 그 배경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
Ⅱ. 백제의 멸망과 당의 지배
의자왕 24년(660), 사비성이 함락되고 의자왕이 소정방에게 항복을 함으로써 백제는 약 600년 왕조의 막을 내리게 되었다. 동시대에 세겨진『大唐平百濟國碑銘』에는 백제 멸망 직후의 당군 지배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이 남아있다.
“5도독(都督) 37주(州), 250현(縣)을 두고 호 24만, 인구 620만을 각각 편호로 정리하여 모두 오랑캐의 풍속을 바꾸게 했다.” 『대당평백제비명』
“置五都督, 七州 二百五十縣 戶四萬 口六百萬 各齊編戶 咸變夷風”
위의 기록에서 ‘도독, 주, 현’은 주목할 만한 행정명칭이다. 당은 이민족에 대한 군사적인 정복 이후에 정복지에 도호부(都護府)라는 당의 관리가 총괄하는 행정조직을 설치하고 그 아래에 이민족의 왕이나 지방 세력가를 장으로 하는 도독부(都督府), 주, 군(郡), 현으로 이어지는 행정단위를 설치하였는데 이를 기미부주(羈府州)지배라고 한다. 이러한 간접 지배 방식에서 기존 세력가의 지역 지배력은 매우 핵심이 되는 사항이기 때문에 위의 『대당평백제비명』에서 언급하는 5도독부(都督府)는 기존의 백제 귀족의 세력권이라고 할 수 있는 5방령(五方令) 방군성체제(方郡城體制)라고도 하는 이 제도는 무령왕 12년(512)에 22담로로 구성되어있던 지방을 5개의 방과 그 하부조직인 군과 성으로 구성한 체제로 각 방에는 700~1200명 정도의 군사가 주둔하며 방령은 군사권과 행정권을 동시에 가지게 되는데 일종의 군관구적인 성격이 강한 지방통치 제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