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자크 루소 Jean Jacques Roussea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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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장 자크 루소 Jean Jacques Rousseau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장 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
※차 례※
1. 루소의 생애와 저작
2. 사회와 문화에 대한 루소의 인식 - 학문과 예술론
3. 정치, 사회철학
3-1. 인간불평등 기원론 3-2. 사회계약론
4.《에밀》로 나타나는 루소의 교육철학
4-1. 에밀(Emile)에 나타난 루소의 교육사 4-2. 교육 방법 4-3.루소의 교육사상 결론
5. 루소 비판
1. 루소의 생애와 저작
프랑스의 소설가이자 사상가로서 널리 알려진 루소(Jean Jacques Rousseau, 1712-1778)는 1712년 6월 28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출생하였다. 태어나자마자 10일 만에 어머니를 여의었는데 그는 에서 “나의 출생은 나의 최초의 불행이었다.”고 쓰고 있다. 그래서 루소는 어머니에 대한 모성애를 동경하였으며 성인이 되어서도 어머니에 대한 콤플렉스로 나타나게 되며, 그의 아버지에 대한 의존감정이 발전했다. 6세 때 이미 그는 아버지와 밤을 새워가며 소설을 탐독하였다고 한다. 특히 그가 읽은 책 가운데 ‘플로타아크의 영웅전’이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10세 때 그의 아버지가 군인과의 충돌로 피신하게 되면서부터 그는 외삼촌댁에서 보내게 되었다. 16세 때 제네바를 떠나 청년기를 방랑생활로 보냈는데, 이 기간에 바랑 남작부인을 만나 모자간의 사랑과 이성간의 사랑이 기묘하게 뒤섞인 것 같은 관계를 맺고, 집사로 일하면서 공부할 기회를 얻었다. 28세 때 그는 파리와 리옹에서 생활하였다. 마블리가의 가정교사로 음악 신보법, 오페라, 희곡, 시 등을 가르치는 음악과 작곡교사로 생활하였고 한때는 정치적 애심을 품기도 하였다. 1742년에 그는 파리로 나와 디드로 등과 친교를 맺고, 진행 중인 《백과전서》의 간행에도 협력하였다. 1750년에 디드로를 방문하러 가던 도중 아카데미의 현상논문‘학문 및 예술의 진보가 도덕의 갱생에 공헌하였는가’에 응모하여 당선되었다. 그래서《학문과 예술론》을 출판하여 그는 사상가로서 인정받게 되었다. 이후《신(新) 엘로이즈》(1761),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논한 《사회계약론》(1762), 소설 형식의 교육론《에밀》(1762) 등의 대작을 차례로 출판 하였다. 그러나《에밀》이 출판되자 파리 대학 신학부가 이를 고발, 파리 고등법원은 루소에 대하여 유죄를 논고함과 동시에 체포령을 내려 스위스, 영국 등으로 도피하였다. 영국에서 흄과 격렬한 논쟁을 일으킨 후, 그는 프랑스로 돌아와 각지를 전전하면서 자전적 작품인 《고백록》을 집필하였다. 그 후 파리에 정착한 루소는 피해망상으로 괴로워하면서도 자기변호의 작품《루소, 장자크를 재판한다》를 쓰고,《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을 쓰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그는 이것을 끝내 완성하지 못하고 1778년에 파리 북쪽 에르므농빌에서 죽었다. 그가 죽은 지 11년 후에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는데, 그의 자유민권 사상은 혁명지도자들의 사상적 지주가 되었다. 1794년 그 당시 혁명 정부를 구성하고 있던 국민공회는 루소의 유해를 위인의 전당인 팡테옹 성당으로 옮겨 볼테르와 나란히 묻었다. 루소의 인생은 로베스피에르의 다음과 같은 헌사로 요약될 수 있다.“오, 참된 숭고한 인류의 벗 그대여, 선망과 음모와 전제에 의해 박해당한 그대, 불멸의 장 자크여, 명예는 바로 그대에게 주어져야 하는 것이다.”
2. 사회와 문화에 대한 루소의 인식 - 학문과 예술론
1750년 "학문과 예술의 부흥은 인간성 순화에 도움이 되는가?"라는 제목의 아카데미 현상 공모에서 1등으로 당선된 작품으로, 루소는 이 논문에서 아카데미가 제기한 물음에 대한 부정적인 답변을 했다. 여기에서 루소는 귀족 사회의 학문과 예술이 도리어 민중의 자유를 억압하는 수단으로 전락되고 있음을 비판하고, 인간의 존엄성은 어떤 학문이나 예술보다 차원이 높음을 강조하였다. 이 저서의 핵심 주제는 다음과 같다.
- 문명은 인류의 독이다.
- 예술과 과학이 완성된 후에는 도덕의 타락이 뒤따른다.
그리고 귀족 사회의 사치와 낭비, 부패로 얼룩진 근대 문명을 살리기 위해서는 무지하고 비천한 민중에게 근대의 학문을 나눠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학예론”은 예술과 과학이 그토록 포괄적으로 인간의 도덕적 타락을 가져오는 방식과 이유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루소는 이런 두 가지 설명을 내놓는다. 첫째, 모든 과학은 게으름에서 형성된 것이고 모든 학문은 나태가 빚어낸 악덕에서 비롯한 것이다. 가령 천문학은 미신에서, 기하학은 탐욕에서, 물리학은 과도한 궁금증에서 시작되었다. 둘째, 모든 예술은 사치가 빚어낸 것이고, 사치는 인간의 나태와 허영에서 나온다.
루소는 특히 사치가 문제라고 강조한다. 사치는 예술과 과학이 없는 곳에서는 번성할 수가 없다. 또한 예술과 과학도 사치 없이는 발전할 수 없다. 그리고 도덕의 붕괴는 사치의 당연한 결과이다. 게으름에서 사치가 생기고 그리하여 인간은 타락하고 또 노예가 되었다. 바로 이것이 모든 문명이 발달해온 역사이다. 따라서 자연 그대로 머무르는 것이 인간에게는 커다란 축복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런 행복한 무지의 상태를 벗어나려고 했고 그런 인간의 노력에 대한 하나의 징벌로서 문명이 나타나는 것은 필연적 결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