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과학 1960년대 시대 개관 및 작품 경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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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1960년대 시대 개관 및 작품 경향
1. 1960년대 시대적 배경
한국 전쟁 이후 우리 사회에는 강력한 반공 반북 이데올로기가 형성되었으며, 그에 기반하여 이승만 독재체제가 강화되었다. 4.19 혁명으로 제기된 민족자립과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도 잠시, 5 16군사정변과 10월 유신으로 군부 독재의 권력이 장악한 시기가 바로 60년대의 정치사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이 시기는 독재에 의한 본격적인 종속적 산업화의 시기이기도 하다. 이에 따라 우리나라는 급격한 경제 성장과 그에 따른 생활의 변화를 느낄 수 있는 시기였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에서 일부 독점재벌이 세계적 순위를 운위하게 된 반면, 대부분의 노동자는 생계비에도 미치지 못하는 저임금과 세계 최장시간의 노동을 강요를 받아야만 했던 시기였다.
(1) 정치적 배경
1) 4.19 혁명
이승만 독재 정권 아래 민중들의 생활은 어려웠고 독재 정치에 대한 불만은 높아만 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민중운동이 점차 활성화 되는 가운데 제 4대 정 부통령 선거가 다가왔다.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국민의 지지를 잃어버린 이승만은 다시 후보로 나왔다. 자유당은 이승만과 이기붕을 각각 대통령과 부통령 후보로 내세웠고, 이에 맞선 민주당은 조병옥과 장면을 후보로 내세웠다. 그런데 선거를 한 달 앞두고 민주당 후보 조병옥이 미국에서 질병 치료 중 사망하였다. 이승만은 자연스럽게 당선 될 수 있었고 문제는 부통령 선거였다. 위기를 느낀 자유당은 선거 승리를 위해 사전투표, 3인조, 9인조 공개투표, 투표함 바꿔치기 등 관청 공무원까지 동원한 불법선거를 저질렀다. 이에 1960년 3월 15일에 행해진 선거는 이승만과 이기붕의 압도적 승리로 끝났다.
그러나 선거 당일, 이승만 정권의 노골적이 부정선거에 격분한 마산의 시민과 학생들은 선거 무효를 주장하며 항의시위를 벌인다. 이 시위를 계기로 3 15부정선거와 이승만 독재를 규탄하는 함성과 시위가 전국에서 들불처럼 타올랐다. 각계각층을 망라한 시위가 전국으로 번지고 있던 4월 11일 마산시위에서 최루탄을 눈에 맞은 후 바다에 버려졌던 김주열(당시 마산상고 1학년)의 처참한 시체가 발견되었다. 슬픔과 분노를 참지 못하고 있던 국민 앞에. 이승만은 오히려 “배후에 공산당이 개입한 흔적이 있다.”는 담화문을 발표하며 사건을 은폐하려 하였다. 부경역사연구소, , 도서출판 선인, 174면
이후 부정선거 규탄 투쟁은 이승만 정권타도 투쟁으 로 전환되었다. 4월 19일 중 고등학생, 대학생, 시민 등 수십만 명의 시위대는 독재 정 권 타도와 재선거를 촉구하면서 이승만 정권의 심장부인 경무대(지금의 청와대 자리)로 향하였다. 이승만은 전국에 비상 계엄령을 선포하고, 무장 경찰을 동원하여 맨손뿐인 시 위대를 향해 무차별 총격을 가하였다. 이 날 하루 전국에서 183명의 학생과 시민이 독 재자의 총탄에 쓰러져 갔고 6천 2백여 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시위가 걷잡을 수 없게 되 자, 이승만 정권은 부정선거의 책임을 물어 이기붕을 물러나게 하는 정도로 사태를 마무 리 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4월 25일 약 300명의 대학 교수들이 “쓰러진 학생의 피에 보 답하라!” 위의 책, 175면.
고 외치며 가두시위를 벌이자 결국 이승만은 대통령 직에서 물러나 미국으로 망명을 떠났다. 이로써 12년에 걸친 제 1공화국은 끝을 맺게 된다. 부패한 독재정권을 민중의 힘으로 무너뜨린 이 거대한 움직임을 4 19혁명이라고 부른다. 이승만이 물러난 다음 1960년 7월 29일 총선거를 통해 장면을 국무총리로 한 민주당 정권이 출범하였다.
2) 5 16군사정변
4월 혁명 전후의 정치적 불안과 무질서를 진정시키기가 급선무임에도 불구하고 제 2공화 국은 집권 초부터 민주당 내(윤보선 장면계)의 신 구파가 파쟁을 일으켜 국민의 성원과 기대를 외면하고 말았다. 더욱이 일부의 분별없는 정치 세력이 개입되어 책임 없는 자유 를 절규하면서 가지각색의 자기주장을 지나치게 요구하는 대소의 강 온건적인 데모 사 태가 벌어졌다. 이런 혼란한 상황에서 육군소장 박정희와 예비역 중령 김종필 등 정치성 향이 짙은 일부 군인들이 1961년 5월 16일 새벽 군사 쿠테타를 일으켰다. 이현희 교양국사연구회, , 청아출판사, 2002, 644면
쿠테타군은 즉각 국가재건최고회의를 구성하여 이른바 ‘혁명공약’을 내걸어 정변을 일으 킨 명분을 밝혔다. 이들은 제 2공화국 때의 정치인들의 활동을 금지 하였으며, 사회단체 를 해산시키고 집회와 시위, 단체 결성을 금지하였다. 또한 언론, 출판을 검열 통제 하였 다. 이로써 4 19혁명으로 싹트기 시작하던 민주주의, 통일운동, 각 부문의 민주화 움직 임은 무참하게 싹이 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