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랑 시인의 비유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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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김영랑 시인의
비유에 대하여
김영랑 시인은 1903년 1월에 전라남도에서 태어나서 1920년 일본 대학에 진학했다. 그 무렵 김영랑 시인은 평생을 함께하는 친구인 박용철을 만나는데, 이 박용철에게서 시를 쓰는 것을 권유를 받게 된다. 하지만 음악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성악을 전공하려 했으나 부모님 반대로 영문과에 다녔다. 그러다 1923년 관동 대지진 때문에 조선인 학살사건이 일어나고 조선인에 대한 일본 사회의 분위기가 나빠지자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조선으로 돌아오고 나서 김영랑 시인은 작가인 최승일과 우정을 나누었다. 그러다 최승일의 누이동생인 최승희와 사귀게 되면서 문단에 소문을 나게 되었다.
드디어 1930년 3월에 김영랑 시인은 《시문학》 창간호에서 , , 와 같은 시편을 발표하여 등단을 하게 되었다. 그 중 ‘동백잎에 빛나는 마음’은 오늘날 정말 잘 알려져 있는 시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로 바뀐다. 그 때는 이데올로기나 불행한 시대 상황을 격정적으로 표현한 시가 많았던 때였다. 거기에 김영랑 시인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다룬 시를 씀으로서 당시의 문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많은 인기를 끌었지만, 불안한 시대상황에 순응하고 현실 도피적이라는 비판도 받았다.
그렇게 박영랑 시인은 시인으로서 성공을 거두게 되었다. 여기에는 친구인 박용철의 도움이 매우 컸다. 일본에서 대학교를 다닐 때 시를 쓸 것을 추천한 사람도 박용철이었고 을 발간하여 김영랑의 시를 알렸다. 그가 박영랑 시인의 시를 얼마나 좋아하고 알리려했는지는 1935년 11월에 《시문학사》에서 ‘영랑시집’을 낸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영랑시집을 펴낸 후 그는 잠깐 공백기를 가진 후 1939년에 《문장》에서 와 《시림》 1호에서 를 발표하고 1940년에는 , 1948년 8월에는 을 발표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해방 이후에는 고향으로 가서 우익 운동을 펼쳤고 1949년에는 공보처 출판국장을 지냈다. 1950년 한국전쟁 때는 서울에서 은거하던 중에 9월 27일에 포탄의 파편을 맞아 돌아가셨다.
김영랑 시인의 시를 보면 아름다운 자연물을 통해 순수시를 표현한 것도 있지만, 위에서 간략하게 설명한 김영랑 시인의 생애를 보면 그의 삶 대부분이 일제강점기를 겪고 6·25전쟁까지 겪은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삶이 불행한 시대와 함께 시작하고 끝을 맺은 것이다. 이런 시대 상황은 그의 시에 영향을 주어 슬픔과 한을 드러내는 것을 볼 수 있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음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