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과학 해방 전후사의 개신교 1920 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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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해방 전후사의 개신교(1920~1970)
개신교는 서북지방에서 활발하게 전파되었다. 서북지방은 조선시대의 지배정책에서 소외된 지역이어서 비교적 자유로운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고 또한 지하자원이 풍부하여 외국인들에 의한 광산 개발이 이루어져서 경제적으로도 다른 지역에 비해 조금은 윤택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러한 조건으로 인하여 서북지방의 개신교는 전국 교세의 80%를 차지하는 위치에 이르게 되었다. 또한 개신교 선교사들이 교육과 의료 시설을 장악하고 있었으므로 근대화를 위한 방법론을 독점하시다시피 하였다. 개신교는 일제의 지배가 본격화되는 과정에서 계몽운동과 신민회 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여 일제의 침략에 대응하였다. 그것은 일찍이 상인세력을 중심으로 한 개신교가 일본의 상인들과 경쟁하는 가운데 저항정신을 가지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은 일본상인들의 활동으로 인하여 상권의 위협을 받게 되었다. 일본 상인들과의 경쟁으로 인하여 제국주의에 수탈당하는 민족의 수난을 자기 것으로 인식하게 되었으며 제국주의에 침략하기에 대항하기 위하여 선진국의 문명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1910년대 서북지방에서는 개신교를 중심으로 양말 공장을 설립하여 일제의 상권에 대항하였고 20년대에는 평양의 물산장려운동에 깊이 관여하였다. 조만식, 이승훈등 50여명의 개신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조선 물산장려회를 형성하였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중단되었다. 그 외에도 일제에 저항하기 위한 개신교를 중심으로 한 서북지방의 상인들의 노력이 여러 가지 있었지만 자체 기반의 취약성, 일제 식민정책에서의 소외, 우세한 자본 등에 의하여 어려운 산업 활동을 할 수 밖에 없었다.
1919년 3.1운동 이후 일제는 민족 운동의 열기를 저하시키려는 목적으로 통치의 방법을 문화 통치로 전환하였다. 문화정치는 민족을 분열시키려는 목적의 정치였으므로 우리 민족은 일본의 민족분열책에 대응하여야 했고 지주와 자본가에게 수탈당하는 농민과 노동자의 문제를 해결해야만 했다. 이러한 요구에 부응하기 위하여 새로운 민족운동의 방법론이 모색되었는데 그것이 사회주의였다. 사회주의 국가의 주도적 역할을 하던 소련은 시베리아와 만주의 독립 운동자에게 이념적, 물질적 지원을 해주었으며 이러한 지원은 국내의 민족운동자들에게도 영향을 주게 되었다. 또한 자본주의로써 수탈을 합리화시키는 일제에 대한 노동자들과 농민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일본은 국내의 식량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산미증식계획을 실시하였다. 산미증식계획의 실시는 결국 농민에 대한 수탈의 강화로 나타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 의해서 교회의 헌금이 감소하고 폐쇄되는 교회도 나타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 처한 개신교의 농민들은 교회의 전통적인 가르침에 회의를 품고 사회주의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또한 교회에 남아있더라도 사회주의의 요소를 찾게 되었다. 이에 개신교는 새로운 사회흐름에 맞추어 나갈 방법을 찾아야 했다. 개신교는 여러 가지 방법을 찾아보았으나 결국 사회주의 사상과 갈라져 민족주의 세력에 속하게 되었다.
개신교는 당시에 여러 가지 문제에 직면해있었다. 위에서 언급한 경제적 문제에 더해 사상적 문제도 큰 문제의 하나였다. 당시에 이광수가 1917년 ‘청춘’이란 잡지에 언급한 과 1918년 매일신보에 연재한 을 통해 개신교의 문제점을 비판하였다. 그가 주장한 개신교의 결점은 4가지로 주장하고 있는데 첫째로 계급적 실태이다. 그는 “목사 장로는 양반이오 보통 교인은 상놈이라 할 만한”이라고 언급하면서 교회의 계급적 실태를 꼬집고 있다. 둘째로 교회 지상주의이다. 종교적인 것 이외는 모든 것을 천히 여긴다는 점에서 교회 지상주의를 비판하였다. 세 번째는 교역자의 무식함을 꼽았다. 교역자는 상당한 학식이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말도 안 되는 시험을 통해 교역자가 되는 것을 비판하였다. 넷째로 기도 만능설 같은 미신적 경향을 들었다. 이와 같이 당시의 교회는 그 행실에 대하여서도 비판을 받고 있었으며 경제적 어려움과 더불어 상당한 곤란을 겪고 있었다.
사회주의 세력에서도 반개신교 운동이 있었다. 당시 사회주의자들은 개신교를 ‘반자본주의’ ‘반제국주의’ 차원에서 개신교에 대한 반대운동을 시작했다. 당시에 반개신교 운동은 신흥 청년 동맹과 한양 청년연맹이란 사회주의 청년단체에 의해 전개 되었다. 1925년 10월 서울에서는 개신교인들이 모여 집회를 열 예정이 있었는데 이에 맞서 한양 청년연맹이 반개신교 대회를 열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 집회는 일본 경찰의 사전 금지로 개최되지 못하였다. 이에 사회주의자들은 개신교가 일제의 비호를 받고 있다고 일제히 공격했다.
그러한 가운데 각 지역에서 반 개신교인들과 개신교인들 간의 충돌이 일어났는데 그 과정에서 사회주의자들이 개신교인들에게 고소를 당하여 투옥 받는 일이 발생했다. 이러한 일들에 의하여 반개신교 운동이 고조되었으나 1926년 중반 민족 협동 전선론이 떠오르면서 이러한 다툼은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이러한 사회주의의 반개신교 운동은 개신교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개신교인들의 반 개신교 운동에 대한 반응은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첫 번째는 반 개신교 운동이 개신교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이었다. 두 번째는 개신교의 폐단을 인정하고 개신교의 폐단을 고치려고 하는 입장이었다. 이러한 충돌로 인하여 개신교인들은 예전보다 많은 사회 참여를 하게 되었고 일제 치하의 현실에 대해서도 더욱 불합리하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1931년 일제가 중·일 전쟁을 일으키면서 조선을 병참기지화 시키기 위해서 내선일체·황민화 정책을 실시하면서 신사참배가 실시되었다. 일제의 신사참배에 대해서 종교 단체들은 반항을 했지만 일제의 강력한 탄압아래 종교 단체들의 굴복이 이어졌다. 1938년 2월 6일 전국에서 가장 교세가 큰 장로교 평북 노회가 일제에 굴복하여 신사 참배를 할 것을 결의하였다. 같은 달 이승만계의 윤치호등도 석방의 대가로 개신교를 통해 내선 일체의 실시에 힘을 다할 것은 서약했고 조선 기독교 청년회(YMCA)의 일본 YMCA로의 통합 등을 결의했다. 그러나 모든 곳이 신사참배에 굴복한 것은 아니었다. 평북 노회가 신사참배에 결의하자 평양 신학교 학생들이 노회의 결정을 거부하고 집단적으로 신사참배 운동을 벌여 학교가 무기 휴교가 되었다. 이를 계기로 전국 각지에서 조직적이고 집단적인 반대 운동이 반대되었는데 평안남도의 주기철, 평안북도의 이기선, 이주원 경상남도의 한상동등이 중심으로 활동했다. 이에 대해 일제는 주기철 목사등 운동 관련자들을 대규모 검거하여 운동을 무력화시켰으나 신사참배에 대한 저항은 비록 소규모적이었고 분산적이었으나 계속되었다.
1938년 일본이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면서 조선에 대한 탄압이 더욱 심해지게 되었다. 그것은 기독교도 마찬가지여서 1940년에서 1945년 해방되기까지 일본은 한국 개신교계에 박해, 회유, 해체를 강요하였다. 신사참배 강요를 통한 천황 숭배, 외국 선교사들의 본국 철수령, 1942년 일본 관제 ‘조선혁신교단’의 이름 아래 조선 기독교를 해체 통합시켜 총독부의 하수인 노릇을 하게 하였다. 이러한 정책에 의해 조선의 기독교는 황폐화 되었고, 교단과 교회조직은 거의 무너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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